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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령 Feb 02. 2020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유골을 먹고 싶었다》

엽기적인 제목이라고? 따뜻한 이야기였다

© 엄마가 돌아가겼을 때 그 유골을 먹고 싶었다


제목만 들었을 때는 거부감이 큰 만화 에세이였다.  엽기적인 제목과는 다르게 진솔하고 따뜻한 분위기는 선입견을 단숨에 거두어 버렸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진도 나가기 힘들었다. 나에게도 곧 닥칠 일이니까 말이다.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가 떠오른다. 이 영화에서 췌장을 먹는다는 의미는 췌장암에 걸린 소녀를 사랑한다는  고백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죽으면 내 췌장을 먹게 해 줄게", "누가 먹어주면 영혼이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살 수 있대"라는 아픈 대사가 나온다. 할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내가 대신 아파해주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는 직설적인 표현이다.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사람, 그 사람이 떠나고 남아 있는 사람의 삶을 생각해 본다.




작가 미야가와 사토시의 자전적인 경험으로 누적 조회수 500만 뷰를 돌파한 만화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절대 우리 엄마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병이 엄마를 덮친다. 이미 손쓸 수 없는 암 말기 엄마와 투병생활을 겪으며 삶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결국 엄마는 이 세상을 떠나갔지만 언제나 사토시 곁에서 함께 한다.


밤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면 수십 통의 전화를 귀찮게 하던 엄마. 하지만 이제 그 전화는 오지 않고 전화번호까지 지우지 못한다. 세상의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었던 엄마표 카레.  이제는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지만 아내가 배운 엄마표 카레로 어렴풋이 기억하게 된다.


엄마와 자주 갔던 장소, 엄마의 유품 등 관계된 모든 것이 가까이에서 바늘이 되었지만 사토시는 시간과 함께 성숙해지고 기억하는 법을 차례차례 배워간다.  죽음은 썰물 같아서 서서히 빠져나갈 뿐 막지 못하는 것이다.





모자만의 특별함이겠지만 어릴 적 큰 병을 앓았던 사토시를 간호하던 엄마의 의지는 시간이 흘러 엄마의 병마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꼭 낳을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는 미친 자신감. 몰래 회복기원 100일 기도를 다니던 일, 건강에 좋다는 야채주스를 빠지지 않고 해주던 일 등 그때는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면 더 해드리지 못해 아쉬운 게 자식 된 도리다.



나도 언젠가는 겪을 일이기 때문에 완벽한 공감은 어렵지만 준비하는 자세로 읽을 수 있었다. 과연 가까운 사람을 잃는다는 건 어떤 감정일까? 엄마지만 죽은 시체 옆에서 무섭지 않을까? 화장하고 남은 유골을 가져가는 일은 안될까? 어차피 엄마의 몸의 일부인 나는 엄마의 유골을 먹어 영원히 간직하면 안 되는 것일까?


저자는 엄마의 죽음 앞에서 충동적으로  든 생각을 메모했고, 훗날 이 책의 제목으로 정했다.




제목이 다소 충격적이지만 아예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은 아니다. 김윤석 감독이 영화 <미성년>에서는 미숙아로 태어나 죽은 동생의 유골을 우유에 타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생각하지도 못한 그 장면에서 아연질색했지만, 영화관을 빠져나가면서  또 다른 애도의 방법이라고 이해했다. 사람마다 애도하는 방식은 다른 것이다.


실제로  파푸아뉴기니 포레족의 경우 장례 풍습 중에 하나였는데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일부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두절미하고 이 책의 내용은 눈물을 쏙 빼는 감동과 사랑,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혹시라도 선입견으로 펼쳐보지 않을 독자를 위해 말하고 싶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순간은 반드시 찾아오고 그 곁을 지켜주는 것만큼 하기 힘든 일도 없다는 것! 나는 부모님과의 추억을 세세히 기억하지 못해 아쉽고, 한편으로 영원히 책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부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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