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이르시는 대로, 그대로만… 그대로만.”
성경 일독은
나의 오랜 과제였고,
소망이었으며, 다짐이었다.
그 시작은 늘 순조로웠다.
창세기, 출애굽기는
시작이라는 설렘과 각오,
그리고
영화나 이야기로 익숙한 서사 덕분에
쑥쑥 읽혀 나갔다.
그러나
문제는 늘 그 다음이었다.
레위기.
읽히지 않는 낯선 언어.
이해되지 않는 문화의 벽.
성경 일독의 여정은
늘 레위기의 고비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다짐은 핑계로 부서졌고,
소망은 좌절 속에 묻혀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창세기 이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번엔 반드시 넘고 싶었고,
기어이 이 고비를 넘어야만 했다.
물론 여전히 어려웠다.
익숙해지지 않는 언어와 낯선 질서,
읽고 또 읽어도
마음은 자주 주저앉았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성경 안으로 들어가려
애를 쓰며 붙잡고 버텼다.
그렇게 겨우
1장, 2장… 겨우 4장까지 읽었을 때,
이번엔
하나님의 뜻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성막을 세우고,
제단을 쌓고,
기름의 위치, 피를 바르는 방법,
제사의 순서와 종류까지—
모든 것이 지나치게 복잡했고,
지나치게 반복되었으며,
불필요할 만큼 세세하다고 느껴졌다.
‘그냥 제단 위에 태우라 하시지…
굳이 이렇게까지 길게,
왜 이렇게 자세하게 말씀하시는 걸까.’
성소의 기구, 제사장의 의복,
불을 피우는 시간과 방법까지—
익숙하지 않은 단어와 문화 속에서
나는 계속 걸려 넘어졌다.
읽은 부분을 되짚고,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나아가려 애썼지만
어느새 집중력은 흐트러지고
나는 조금씩 지쳐갔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 조심스레 물었다.
“하나님, 왜요……”
비록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결국,
약속한 묵상 분량은 끝까지 채웠고,
하나님은 그제야
단호하고 명쾌하게 말씀하셨다.
“너의 생각은 필요 없다.
너의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말라.”
그 말씀은
비수처럼 내 마음을 찔렀다.
하나님 앞에
나의 생각을 앞세웠던,
창세기에서 시작된 죄의 본질.
나는 그 죄를 잊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교만으로 말씀을 대하고 있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존재인 나는,
그저,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면 될 뿐이었다.
‘내 방식’이 아니라
‘주께서 이르신 그대로’ 살아가는 삶.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언젠가 뜨겁게 눈물을 흘렸던
사도행전 9장의 말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다시 그 장면 앞에 서 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지금, 누구를 대적하고 있는가?
나는 주장이 강한 사람이었다.
커리어, 자격증,
무슨 일이든 겁내지 않고 해내는
'능력자'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일조차
내 방식대로, 내 능력으로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삭이셨다.
"얘야, 그 일에는
너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 많단다.
너의 능력은 필요치 않아."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나’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나’였다.
내가 만들어낸 “Something의 삶”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자만이었고, 욕심이었다.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것은
“Nothing의 나”
그저,
빈 마음으로 서 있는 '나'.
조용히, 묵묵히, 겸손히
말씀 앞에 잠잠히 순종하는 '나'였다.
얼마나 많았을까.
나를 지켜보며 낙심했던,
상처받은 영혼은....
얼마나 많았을까.
기도 중에 내 이름을 부르며
눈물 흘렸던 그 이들의 마음은…
나의 지금은
그 눈물과 기도 위에 서 있었다.
“Let my heart be broken
by the things
that break the heart of God.”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 일로 인해,
내 마음도 아프게 하소서.—
그 아픔으로,
다시 주님 앞에 온전히 서게 하소서.
그 아픔으로,
나를 녹여
세상에 흘러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