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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ookong Jun 27. 2022

귀찮은데 하찮으면 안 되는

나의 정신건강이야기 4.

R정신건강의학과에서 상담과 치료를 받은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처음 병원에 방문했을 때, 자가진단 결과와 다름 없는 '우울 중증 단계'를 진단 받았고, 나는 그에 맞는 약과 상담을 이어가고 있었다. 몇 가지 검사 결과,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불안과 스트레스 수치는 낮았지만 우울 수치가 꽤 높게 나온 편이라 우선 수면 장애로 인한 우울감일지도 모른다며 수면 치료를 병행하게 됐다. 또 뜬금없이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평소보다 불편한 감각이 예민해졌다고 느낄 때 먹는 '필요시' 응급약도 처방받았다. '필요시' 약을 처음 받았을 땐 내딴에 응급상황에만 먹는 것으로 알고 적당히 견딜만하면 참고 넘겼는데, 적당히 견디지 말고 먹고 진정시키는 약이라고 설명해주셔서 지금은 자다가도 심장 박동이 침대 매트리스 스프링을 튕길 듯한 느낌이 들거나 느닷없이 호흡이 간지러우면 '필요시'약을 꺼내 먹곤 한다. 

항우울제, 수면유도제, 필요시. 처방받은 세 가지 약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약은 단연 '수면치료제'다.

이 약은 잠들기 30분 전에 먹고 누우면 스멀스멀 눈이 감기고 나도 모르게 잠이 든다. 정신이 깨어 눈을 뜨면 아침인 게 너무 기분이 좋았다. 이전에는 열심히 노력해서 잠이 들면 한 시간, 30분 간격으로 깨어나 잠자리를 설치곤 했는데 이제 이 약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안심이 된다. 잠들고 싶을 때 미리 먹고 기다리면 된다는 게 우선 불안과 짜증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 같다. 솔직히 이 약에 의존해 잠을 자게 될까 봐 걱정했는데, 의사 말로는 수면 패턴과 습관을 바꾸는 동안 도움을 주는 약이라 큰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사실 중간에 약을 두어 번 일부러 안 먹은 적이 있었는데, 새로 이사한 집에 다녀가신 엄마한테 들킬까봐 몰래 먹으려다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와 계신 4박 5일 동안 두 번은 먹고, 두 번은 못 먹었는데, 다행히 체감되는 변화는 없었다. 그래서 이제 그만 먹어도 되나 생각도 했는데, 그건 아니란 걸 엄마가 다녀가신 후 바로 알게 되었다. 며칠 함께 한 엄마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서 공허함에 또 다시 울적한 기분이 들었고, 주체 못 할 외로움에 상담일자를 기다리는 날도 있었다.


병원에 다니는 한달 사이, 어쩌다보니 병원에 정신의학 상담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친한 몇 사람들에게 알리기도 했다. 그중 몇 사람은 속상해 울기도 하고, 몇 사람은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몇 사람은 지속적으로 나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묘하게 한결 가벼워지는 나를 느꼈는데, 비밀스러운 나의 이야기를 공유해서 가벼워졌다기보다 그들의 따뜻한 관심과 걱정이 오그라든 내 마음에 생기를 일으켰다고 해야 하나.. 

이런 느낌을 의사에게 들려주었더니, 


'**씨는 금방 잘 지내게 될 거예요. 대부분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없어서 더 힘든 분들이 많거든요. 다행이네요."


겉으로는 '그런가요?'하고 말았지만 사실 속으로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신기하게도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의사의 상담이 필요하다고 느낄 즈음, 과거에 친하게 지내다 자연히 소원해진 사람들에게 뜬금없이 연락이 자주 왔었다. '갑자기 내가 생각났다, 햇살이 좋은데 네가 떠오르더라, 코로나도 조용해졌는데 얼굴 좀 보자'... 그때만 해도 누군가와 약속을 잡고 만나는 것 자체가 귀찮고, 힘든 시기였기에 아무리 반가워도 단번에 약속을 미뤘었을 나인데 자연스럽게 나또한 그들과 짧게라도 얼굴을 마주하고, 근황을 나누고 싶어졌다. 한 번이 두 번, 두 번이 또 세 번으로 이어졌고 그럴 때마다 조금씩 마음 속 그림자가 거둬지는 기분도 들었다.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하늘이 나를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그들을 불러들인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더 감사한 마음으로 그들을 만나게 되기도 했다. 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비단 나와 똑같은 문제는 아니어도 각자의 고민과 갈등으로 삶의 일부분 위축되어 있었고 그것들을 나름의 방식대로 견뎌내고 있었다. 그렇다해도 타인의 암보다 내 발끝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프다고.. 나는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은 했지만 '그래도 당신은 나보다 낫네요'로 편협한 생각을 일관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날, 평소 좋아하는 C를 만나게 된 적이 있는데,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의 경험을 비추어 나를 위로하기보다 오롯이 보이고 느껴지는 대로의 나를 차분히 들려주었다. 이전에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나에 관한 이야기, 밖으로 보이는 나의 이미지, 내 말투, 내 감성, 내 표현 등 꽤 자세하게 내가 못 본 나를 설명해주었다. 그러면서 어쩌면 나는 스스로 빛나는 밝기를 알고 있기 때문에 현실 속 조도에 대한 아쉬움과 내가 생각하는 밝기만큼 못 미치는 자신에 대한 엄격함이 지금의 위축감을 가져온 것이 아닌가 한다고도 했다. 수많은 이야기 중에 뭔가 들킨 것 같은 묘한 한 마디가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에 대한 엄격함..


나는 대부분 사람들을 대할 때 괜찮은 상태의 모습, 흐트러지지 않으려는 모습, 진짜 힘든 마음은 감내하고 상대에 비교적 맞추려는 모습들이 많았다. C는 그런 모습을 두고 스스로 주인공이 아닐 때가 많은 것 같다고도 했다. 맞는 말이다. 나만 넘어가면 된다는 생각이 강했고, 차라리 내가 미안한 게 낫다는 생각도 강했다. 무의식을 지배했던 그 생각들은 일을 할 때, 주인의식의 가면을 쓰고 벅찬 일 앞에 앞장섰고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앓았다. 못한다고, 나 대신 네가 하라고는 말 못하고 너의 실수는 내가 잘 정리해보겠다는 말은 서슴없이 했던 것. 대충은 그랬던 일이 많았다. 오지랖이라고도 할 수 있는, 딱히 살면서 꼭 필요한 태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선택이 언제나 어둡고 아픈 결과를 낳았었다. 내 편이 없고, 모두 반대편에서 피해가기 바빴고, 자신만 변호하기 바빴다. C의 말을 듣다보니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인간 심리'를 이해하려고 버텼던 지난 날의 내 모습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C는 한심한 모습이 아니라 착해서라고 나를 위로했지만 끝엔 '네가 주인공이 되는 삶을 선택하라'라고 한 번 더 강조해주었다. R정신건강의학과 김원장님이 아닌 또 다른 전문의를 만난 듯 나는 그날, 신나서 있는 얘기 없는 얘기를 탈탈 다 털어놓은 것 같다. 아주 어렸을 적 트라우마부터 가장 최근에 겪은 인간관계의 서러움까지 소상하게 말이다. 다만 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봐야 할 사람이라는 점에서 이불 킥이 좀 있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도 밝히지 못한 구석을 찾아낸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외로움을 즐기는 편이었던 내가 어느 날, 사무치게 외로움을 느꼈을 때 그런 내 곁에서 '모두가 외로워'라는 말 대신 '너의 외로움은 어떤 색이냐' 물어주는 내 곁에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만큼의 효과를 본다. 꽤 오랜만에 행복이 느껴졌다. 내일은 14일 간의 심리 변화와 상태를 상담하는 날. 지난 번 항우울제 용량을 늘려서 인지 처음보다 많이 호전된 상태같은데, 어제 오늘 장마로 들쑥날쑥 했다. 

의사가 많이 좋아졌으니 우울제는 그만 먹자고 하면 좋겠다. 꼬박꼬박 약 챙기는 게 귀찮기도 하고, 다시 내 의지로 극복하고 싶기도 하고. 이또한 자만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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