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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ookong Oct 11. 2017

다른 사람들도 그래요

나와 같은 지, 괜찮은 건지 묻는다

 

2호선 성수역에 도착해서 출구로 나가는 첫 계단 앞에서 느린 발걸음을 결국 멈추게 되었다.

오늘따라 눈에 띄는 '뛰지맙시다'는 오전 내 무겁게 끌고 나온 내 두 발에 어쩐지 위로를 건내는 메모 같았달까.

시청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뛰어야 하는 삶인데, 머물러 있는 지금의 삶을 자책했다. 나날이 자존감은 낮아지고 동시에 할 수 있는 것들이 할 수 없는 것들처럼 느껴지는 요즘이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어른들이 '내가 왕년에'라는 표현을 말머릿마다 추임새처럼 붙여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나름의 화려했던 왕년을 거들먹거릴만한 나이가 되었고, 그 당시 어른들이 뱉어낸 추임새는 어쩌면 현실을 뒤로하고 과거를 보상받고 싶어하는 심리였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렇다. 나도 왕년에는 기운이 강하고 목적없이도 앞으로 전진했고 그런 나를 부럽게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거울 앞에 선 스스로의 모습에 당당했고 때로 넘치는 자신감을 즐긴 날들도 있었다. 

다시 지금을 직시하면 그 때의 나는 온데간데 없고, 정확히 말하자면 정반대의 모습으로 불투명한 쇼윈도 앞에 서 있다. 반듯한 쇼윈도에 안으로 비치는 내 모습은 만족하지 못하는 나의 생활,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나의 삶처럼 뿌옇고 어두웠다. 절망적이었다.


긍정적이고 낙천전인 성격은 사교성과도 연결되어 내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나이, 국적, 학벌, 스펙 모든 것을 망라하고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고, 적응했던 나다. 그만큼 내게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사람들은 그들의 기준치에서나 힘들겠거니 생각했을 거고, 그만큼만 위로와 공감을 해주었다. 물론 그만큼도 감사한 것에는 틀림이 없다. 다만 내가 그들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더 밝으려고 애썼고 속으로 안으로 소화시키려 고단했다. 이제와서 고백하건데 애쓰고 고단했던 건 결코 진정 받아들이거나 소화가 되었다는 건 아니었나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할 수 있는 한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방법을 찾았다. 그림을 그리거나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는 것말고도 철학과 심리를 배울 수 있는 도서들을 쌓아놓고 공부하듯 읽고 다독였다. 그래서 시간이 갈 수록 한결 내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고 균형져갔다.

그런데 다스림에도 임계치라는 것이 있을까, 아니면 나약해져 버린 걸까.

요즘의 나는 불투명한 쇼윈도 안의 구부정하게 서 있는 스스로가 원망스럽고, 마주 바라보고 싶지조차 않아졌다. 당연히 불운하고 시커먼 감정들이 기다렸다는 듯 내 안에 자리를 잡고 번져가기 시작했다. 안다. 그렇게 우울해지고 자괴감의 늪으로 입문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나는 금수저도 아니고, 내 집과 차가 보란듯이 준비된 골드미스도 아니고, 학력과 스펙이 엄청난 알파걸도 아니다. 어딜가도 시선을 끄는 출중한 외모를 갖지 못했고, 곱고 단아한 분위기가 풍기지도 못한다. 그 기준도 사회가 만든 것이라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일부는 자연, 동물적인 기준이기도 해서 우선은 적당히 비교해 볼 때 그렇다. 하지만 이 세상에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이 오직 나 한 사람 뿐일까 생각해보면 즉시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 길을 가다 우연히 스쳐가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 혹은 가깝게 나와 자주 만나는 친구나 지인들만 보더라도 '보통의 삶'을 살아간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 현실에 만족해서? 미래가 없어서? 확보된 자원 즉, 부모의 지원이나 미리 당겨받은 유산이 있어서? 모르겠지만 아마도 '열심히 살아서' '계획대로 살아서' 라고 말할 것만 같다. 아니 '그래야만 된다'고.

  

그 열심히 산다는 것과 계획대로 산다는 것에 대해 내 나름의 생각은 지금의 내 현실만 두고 볼때 사치롭게 들릴 게 뻔하다. 하루 하루 무탈하게 살고, 촘촘한 계획보다 순간의 해결이 지금까지의 내 삶의 방식이었으니까. 내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맞을 거다. 그 사치를 누리느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지 보지 않았던 거다. 즐거운 사람들을 만나고, 즐거운 순간들을 누리고 지내느라 '흐름대로 자유롭게 산다'는 멋진 의미를 허투루 새기고 살았던 게 아닌가 싶다. 나와 함께 했던 사람들 중의 누군가는 그 순간 틈틈히 열심히, 최선을 다해 그리고 철저한 계획과 기준 안에서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도 어느 삶이 옳다고 지정할 수 없지만 반성이 되는 지점이다.


'뛰지맙시다'. 처음에는 반대로 읽혀졌다. 열심히 뛰는 이들에게 조금 천천히 가라는 뜻이라 내게 경고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격지심이었다. 그리고 이 사진을 찍기 직전에는 다른 의미로 읽혀졌다.

'자신의 현실을 알았다면, 계획합시다' 

뭐가 되었든 들뜨지 않고, 방황하지 않고, 조급해하지 말고 다시 삶을 리셋하라는 의미로 읽혀졌기 때문이었다. 잘못되었다고,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나무라는 말보다 더 따가웠고 또 따뜻했다. 내 편에 서서 알려주는 조언같았으므로. 


나는 지금 멈추어 있다. 아니 고여있다는 게 맞다. 고여있는 물도 바닥이 뜨거워지고 공기가 훈훈해지면 아래로 끓고 위로 증발하게 되어 있다. 고여있는 내 삶을 들끓게 할 수 있는 정성적, 정량적 재활을 해야 할 때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만약 나와 같은 다른 사람도 있다면 우리가 다시 증발되는 그 공중에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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