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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푸지 Aug 27. 2024

피임약을 먹었을 뿐인데

 나, 감정에 뭔가 이상이 생긴 것 같아

2023년 12월부터 내 생활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매일 오후 1시 50분이면 약속했다는 듯 새끼손가락 손톱보다도 작은 약을 한 알씩 복용하게 된 것이다. 혹시라도 까먹을까 봐 애플워치 투여약 알림도 설정해 놨다. 저녁은 약속이 있거나 술자리가 있을 수 있고, 오후 2시 이후에는 미팅이 잘 잡힐 수 있기에 점심 먹은 직후인 1시 30분에서 2시 사이가 최적의 시간이었다. 나름대로 다양한 변수와 상황을 고려해 고민 끝에 복용 시점을 설정한 것이다. 다낭성 난소 증후군을 치료하기 위해 복용하는 피임약은 이렇게 매일, 동일한 시간대에 먹는 게 중요한데, 복용시점에 변동성이 크다면 약의 효과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MBTI P형 인간인 데다 계획표를 꼼꼼하고 철저히 지키는 타입은 아니었기에 정해진 시간대에 피임약을 먹는 것이 얼마나 성가신 일이었는지 모른다. 1시 50분이란 평일, 회사에선 의식하기 쉬운 시간이지만 주말엔 참으로 애매한 시간이었다. 밥을 먹으러 이동하거나, 약속 장소로 이동하는 시점일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미처 물을 챙겨 오지 못한 탓에 물 없이 지하철에서 약을 입에 넣고 삼킨 적도 다반사였다. 여행이라도 가면 어떠한가. 왠지 안 좋을 걸 알면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서 손에 쥐고 있는 커피랑 약을 함께 먹기도 하고, 놀이기구를 타려다 갑자기 주섬주섬 파우치를 꺼내 약을 챙겨 먹기도 했다. 급하게 물을 찾는 일은 당연히 매우 빈번히 발생했다.



그러나 피임약을 먹는다는 건 귀찮음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마치 머피의 법칙에 빠진 것 같은 날, 그전까지 의식하지 못했던 나의 상태가 무언가 이상함을 직감했다. 애인과 만나기로 한 날, 목걸이를 오랜만에 하려는데 목걸이가 아무리 애를 써도 구멍에 도무지 걸리질 않는 것이다! 한참을 낑낑대다 결국 엄마에게 SOS를 쳤고, 그제야 제대로 목걸이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집에서 출발했어야 했던 시간을 넘긴 후였다. 마음이 급해진 탓에 버스를 타러 뛰었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미 마을버스가 눈에서 지나치고 있었고, 일요일 특성상 한참 뒤에야 마을버스를 탈 수 있었다. 지각은 확정되었고, 어찌어찌 역에 도착해 지하철을 탔지만 무슨 정신머리였던 것인지 약속 장소 한 정거장 전에 내려버린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분풀이할 대상도 없고, 그저 멍청한 착각을 해버린 나 자신에 너무나 화가 나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져버렸다. 다시 지하철을 기다리며 애써 눈물을 삼켰지만 여전히 눈물샘 폭발 위험은 도사리고 있었다. 결국 시간을 20분이나 넘겨 만남의 장소에 도착했고, 애인을 보자마자 이때다 싶어 다시 펑펑 울어버렸다. 결국 그에게 이야기해 버렸다.


나, 감정에 뭔가 이상이 생긴 거 같아.



이렇게 감정이 너무도 쉽게 요동치기 시작했던 건 아마도 24년 1월부터였던 것 같다. 무언가 이상함을 자각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생각해 보면 피임약을 복용하고 나서부터 사소한 것에도 수도꼭지가 된 것 마냥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처음 나인 홀 라운딩을 나갔을 때였을까. 동생의 자세와 나의 자세를 비교하며 누가 더 잘하느니, 이야기하는 외삼촌과 이모부에게 어찌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속상한 마음 한가득 품은 채로 가족 식사 자리의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 눈물을 삼켰다. 이미 감정이 올라와 있는 상황에서 가족 여행 총대를 메고 있는 내게 동생이 ‘난 여행에 안 가도 그만’이라는 말에 서운함과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화살은 엄한 사람에게 내리 꽂히고 말았다. 스물여덟이나 나이를 먹었는데 이런 것에 쉽사리 속상해지고 아이 같은 마음이 드는 스스로가 너무 미웠다. 이전 같으면 웃어넘겼을 일에도 쉽게 감정이 올라오고 있던 것이었다.


산부인과에 가서 모든 사례를 풀진 않았지만, 무언가 감정 상태가 이상해진 것 같다는 이야기들을 했다. 그리고 이런 감정 기복이 피임약을 먹기 시작하고 나서 더 심해진 것 같다고. 선생님은 피임약의 부작용일 수 있다며 위로해 주셨는데, 이 마저도 감동스러워 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정말 이상한 것에 감정이 북받치고 있지 않은가!). 상태를 인정받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일렁일 수 있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음과 동시에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다. 부작용이 발견된 이상 계속 약을 복용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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