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광 Oct 11. 2016

캐피탈의 추억

이사하는 어느 화주(貨主)의 회고

“여기 별로죠? 저도 여기에 오고 싶지 않았어요. 떠나온 곳은 제가 20년 살았던 집인데, 저라고 떠나고 싶었겠어요? 여기는 더 좁은데다 반지하인데 말이에요. 게다가 이 집은 언덕배기에 있어서 한번씩 밖에 나갔다 들어오는 것도 일이고, 이렇게 이삿짐센터 부르는 것도 미안하구요. 이게 다 사채 때문이에요.
 
제가 사채를 썼어요. 얼마 안 됐어요. 3천만원 정도 빌렸어요. ‘현대캐피탈’이라고 해서 믿었죠. 그런데 그게 다 사기였어요. ‘현대’가 제가 아는 그 ‘현대’가 아니었던 거죠. 사채가 그렇잖아요. 이자가 금방금방 불잖아요. 저도 알아요. 금방 갚을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연락이 안 됐어요. 돈 갚겠다는데, 이 사기꾼놈들이 연락을 안 받았어요. 이자는 계속 불었어요. 결국 1억5천만원짜리 집을 날렸어요. 네, 아침에 짐 싸서 나왔던 그 집이요.
 
누구를 탓하겠어요. 제가 죄인이죠. 멍청한 제 탓이죠. 제 손목을 자르고 싶은 심정이에요. 아무리 급해도, 절대 사채는 쓰지 말아요. 특히 문자로 광고하는 곳들은 눈길도 주지 마요. 아무도 믿을 수가 없는 세상이에요. 절 봐요. 저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이제는 은행 거래도 막혔어요. 제 이름으로는 어디다 계좌이체도 못해요. 그래서 아침에 3만원도 대신 입금해 달라고 부탁드렸던 거예요. 장롱 같은 거 버리려면 구청에 돈을 내야 하는데, 제가 돈이 있어도 못 내요. 은행 거래가 막혀서. 다 사채 때문에 이렇게 됐어요. 그래서 이사 온 거예요. 동네에 소문날까봐. 사채 때문에 망한 집이라고 소문나기 전에 여기로 온 거예요. 부끄러워서 거기서 어떻게 버티고 살겠어요.
 
이 집은 월세예요. 보증금 500만원짜리. 이거라도 얻어서 다행이에요. 하마터면 길바닥에 나앉을 뻔했어요. 아들이랑 같이 살고 있는데, 아들 보기가 미안해요. 아직 결혼도 못 했어요. 장가간다고 해도 제가 보태줄 수 있는 게 없어요. 이제 가사도우미일이라도 나가려구요. 다음 주부터 일 나가기로 했어요. 굶어죽지 않으려면 뭐라도 해야 하잖아요.
 
이제는 죽고 없는 남편도 웬수예요. 우리 아저씨가 위암 걸리고 3년 있다 죽었어요. 그런데 죽기 전까지 얼마나 악착같이 돈을 썼는지 몰라요. 얼마나 산다고, 그때 임플란트까지 했어요. 곧 죽을 사람이 뭐 그렇게 맛있는 걸 먹고 싶었는지, 참. 도움은 못 줄망정, 안 그래도 없는 돈까지 다 까먹고 간 사람이에요, 우리 아저씨가. 원망스럽기만 해요.
 
이 옷장 무겁죠? 어디서 산 게 아니라, 우리가 재료들 사다가 직접 만든 거라서 그래요. 우리 아저씨가 목수였거든요. 아무리 웬수라지만, 이건 어디다 못 버리겠더라구요. 많이 낡았지만, 그래도 저 쓰라고 만들어 준건데, 어떻게 버리겠어요.
 
필요도 없는 사진들은 왜 안 버리고 다 가져왔나 싶어요. 이참에 버려야지. 이건 우리 엄마 칠순잔치 때 찍은 거예요. 여기 이게 저예요. 저도 젊었죠? 이때가 좋았는데... 이 사진 보면 괜히 마음만 아파요. 찢어서 버려야겠어요, 이렇게. 지금 아니면 또 못 버리고 계속 간직하고 있을 테니까요.
 
여기서 오랫동안 살 생각은 없어요. 제가 임대주택을 신청할 자격이 되거든요. LH에서 하는 거요. 그거 되면, 여기보다는 좋은 곳으로 옮겨갈 생각이에요. 다음에 저희가 이사 가게 되면 또 부를게요. 여기 이삿짐센터 전화번호가 뭐였죠? 오늘, 잘해 주셔서 고마워요. 고생 많으셨어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노가다 어벤져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