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지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고 운명도 달라집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금언도 여기서 비롯됩니다.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말은 처지에 따라 그 생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처지에 눈이 달렸다”는 표현을 하지요. 눈이 얼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발에 달려 있다는 뜻이지요.
ㅡ故신영복 『강의』 中
#역지사지
일 시키는 사람은 모든 일이 적어 보이고, 일하는 사람은 모든 일이 많아 보인다. 노가다판에서도 정확하게 들어맞는 말이다. ‘일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사람을 두 명만 부를 수가 있지?’ 일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그렇다. ‘이 정도 일이면 두 사람 부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일 시키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지당하다. 모든 갈등은 여기서 비롯한다. ‘현장에서 사람을 적게 부른 탓에 나만 뺑이치게 생겼다’라는 불만과 ‘도대체 일을 얼마나 쉬엄쉬엄했으면 이것밖에는 못했나’라는 불신은 서로간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결과다.
#삔 줍기
4층짜리 빌라 앞. 공사장 인부 차림의 두 사람이 건물을 올려다본다. 콘크리트 작업을 끝마친 뒤라 건물의 뼈대는 대부분 완성된 상태다. 어떤 일들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는 현장소장으로부터 작업지시를 받기 전까지는 모른다.
“일단은 옥상에 가서, 바닥에 널브러진 ‘삔’부터 주워요.” 현장소장이 두 사람에게 작업을 지시했다.
삔은 검지와 중지를 합한 것만한 크기의 쇠붙이다. 삔은 ‘폼’끼리 연결하고 고정하는 데 사용되는 물건이다. 폼은 일종의 거푸집이다. 콘크리트 건물은 일단 폼으로 모양을 잡은 뒤, 폼과 폼 사이의 빈 공간에 콘크리트를 붓는다. 이 작업에는 레미콘 차량이 동원된다. 콘크리트가 모두 굳고 나면, 거푸집 역할을 다한 폼을 뜯어낸다. 그 과정에서 폼과 폼을 연결하던 삔들이 바닥에 무수히 쌓이게 된다.
문제의 '삔'. 정식명칭은 웨지핀(wedge pin).
삔 줍는 일은 어려울 게 없다. 하나하나 마대에 주워 담으면 된다. 일하러 나왔는데 ‘삔 줍기’ 미션을 받게 된 경우라면, 일당은 최저치를 받을지언정 몸이 고되지는 않기에 나름대로 운이 좋은 날이다. 노가다 경력 7년차인 현수(42)가 “오늘 땡 잡았네”라며 “이게 돈은 많이 못 받아도 일은 힘들 게 하나도 없어. 오늘은 한 11만원쯤 받을라나”라고 말했다.
#"노가다는 땀 흘리는 거 아니야"
현수가 쉬지 않고 말했다. “삔 주울 때 중요한 게 뭔지 알아? 이렇게 노가리 까면서 쉬엄쉬엄 일하는 거야. 어허, 이 친구 보게. 노가다하면서 절대 땀 흘리는 거 아니다. 일하다 힘들면 쉬는 거야. 지켜보는 사람도 없는데, 우리가 고생해서 일한다고 누가 알아주겠냐. 현장소장이나 누가 우리 지켜보고 있을 때, 그럴 때는 이제 열심히 하는 척해야지.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현장소장이 나타났다. “옥상, 아직도 다 안 주웠어요? 서둘러서들 하시고, 여기 다 주우면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또 삔 주워요. 그리고 마대에 많이씩 담아요. 안 그래도 마대 부족한데 이렇게 조금씩 담으면 어떡해요. 이것보다 두 배로 담아요.”
작업지시를 뒤로하고 현장소장이 사라지자 현수가 혼잣말했다. “하여간 개새끼. 사람 쉬는 꼴들을 못 봐요. 그리고 마대에 많이 담으면 고생하는 게 누군데? 그거 다 우리가 들어서 옮겨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마대 그까짓 거 얼마나 한다고. 아낄 걸 아껴야지. 에라 모르겠다. 쉬엄쉬엄해. 담배 한 대만 피우고 하자. 천천히 해. 일 많이 해봤자, 일을 일찍 끝내주길 하냐, 돈을 더 주길 하냐. 일 많이 하면 그만큼 일만 늘어나는겨. 천천히 해.”
#"담배나 한 대"
현수가 말했다. “이제 삔도 다 주워가는데 뭐하지? 일단은 새로운 일 시키기 전에 시간이나 때우자. 담배나 한 대 피우자.”
담배가 중간쯤 타들어갔을 때 현장소장이 귀신같이 나타났다. “이제 다 주웠죠? 그러면 담배마저 피우고 나면 1층으로들 내려와봐요.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았어요.”
#정보 비대칭
일거리는 끝이 없었다. 일 하나를 끝내고 나면 다른 일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일을 끝내면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식이었다. 현장에는 ‘정보 비대칭’이 완연했다. 일하는 사람은 일시키는 사람이 오늘 하루 동안 얼마만큼의 일을 끝내려고 계획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오후 5시가 되기 전까지는, 일당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하릴없이 ‘까라면 까는’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막일꾼은 언제나 손해당한 기분이 든다. 똑같은 일당을 받고도 더 많은 일을 하게 됐음을 억울해한다.
현수는 점점 말을 잃었다. 노가다는 땀 흘리는 게 아니라던 호언은 온데간데없고, 비지땀으로 온몸을 적신 채 현수는 말없이 담배만 뻐끔뻐끔 태웠다.
#"이래서 일을 열심히 해봤자"
시간은 흐른다. 오후 5시는 어김없이 찾아온다. 현장소장 손에 흰 봉투가 들렸다. 현장소장은 봉투에서 녹색의 지폐를 한 장 한 장 꺼낸다. 인부 두 사람은 돈 세는 현장소장의 손에는 마치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한 눈빛으로 서 있다. 사실은 온 신경이 현장소장의 손에 쏠려 있음에도 말이다. 현장소장은 두 사람에게 돈을 쥐어주고 “수고들 했어요”라며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봐요”라고 했다.
돈을 받고 돌아서자마자 현수가 한 장 한 장 세어본다. 10장이었다. 10만원. 못해도 11~12만원 받고 일하는 게 일상화된 노가다판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10만원. 현수는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무언가 말을 내뱉으려다 삼켰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는 그였다. “씨발, 이래서 일을 열심히 해줘봤자 아무 필요가 없어. 좆같은 새끼. 내가 다시는 여기로 나오나 보자. 인력소장 그 새끼가 여기 일당을 몰랐을 리가 없어. 오늘 아침에 내가 일당 얼마 받으면 되냐고 물어보니까, 그 새끼가 말을 얼버무리더라고. 하여간 좆같은 놈들.” 현수가 한 걸음 한 걸음에 욕지거리를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