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이 나비의 변태와 같다면, 나는 지금 번데기 단계에 있다.
누구나 스무 살에 성인이 된다. 하지만 어른이 되는 일은 나의 모양을 아는 일이므로, 사람마다 때가 다르다. 더군다나 한국에서 성장한 사람이라면 수능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을 유예하므로 자신을 살펴볼 시간이 충분치 않다. 그렇게 제 껍데기가 굳어질 새도 없이 획일적인 삶의 궤도에 영혼을 끼워 넣은 채 시간이 흐른다. 틀을 비집고 나온 순간 느낄 감정은 고통일 것이 분명하다. 본능적으로 예감할 수 있는 공포 앞에서, 머무르던 곳을 빠져나오기로 마음먹는 일은 쉽지 않다.
지금의 나는 나비의 변태 과정으로 치자면 번데기 단계다. 나의 모양을 알지 못한 채 이리저리 휘둘리고 찌그러지며 남에게 나를 끼워 맞추던 애벌레 시기를 거쳐, 이제는 제법 그럴듯한 윤곽이 잡혔다. 내 영혼의 모양새를 조금 알 것도 같다. 나의 아주 깊은 마음속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느껴진다. 표면적인 행동을 파고들어 가, 그 뿌리가 된 기억이나 감정을 마주하는 과정이 익숙해지고 있다. 나를 모르는 시기를 지나 나를 알아가는 시기에 도달하니 자존감이 죽순처럼 매일 자란다. 타인의 표정 하나, 한숨 하나로 흔들리지 않게 된다.
다만 번데기 단계에는 단점이 있다. 나에게 몰두하느라 주변을 잘 살피지 못한다. 마주하는 모든 것을 나로 치환한다. 그러다 보니 주변인들은 답답하고 서운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위로를 건네기도 전에 눈을 반짝이며 '나도 그랬는데!'하고 외친다던가. 생각이 갇혀 자꾸 안으로만 향한다. 이전부터 알던 사람이라면, 이기적이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했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사회성이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보이는 요즘. 번데기 시기의 사람은 '사회성 부족'이라는 오명을 달기 딱 좋은 상태다. 남에게 휘둘리지 않으면서, 나에게 매몰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성장의 속도나 형태에는 단 한 건의 중복도 없다. 존재하는 모든 개인은 각자 다른 시기에 다른 형태로 변화를 겪어낸다. 어쩌면 평생을 애벌레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게 삶이라면, 누군가가 지금 번데기 단계에 있다고 해서 섣불리 '손절'할 수 있을까. 또, 자신이 지금 번데기라고 해서 자책할 필요가 있을까. 정말 사회성이 좋은 사람은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마저 헤아린다고 한다. 자신이 그 모든 과정을 겪고 나비가 되었다면, 자신도 언젠가 애벌레였고 번데기였음을 기억하고 헤아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번데기가 된 줄도 몰랐던 시기를 거쳐, 이제는 어떻게 나비가 될 수 있을지만 궁리하고 있다. 조급한 마음이 드는 것을 애써 달래 본다. 그래도 이쯤 되니 길을 잃었을 때 대처하는 행동지침이 생겼다. 바로 안테나를 세우고 많이 듣는 것. 책도 좋고 대화도 좋다. 그러면 놀랍게도 힌트가 도처에 있다. 이른바 '병렬 독서'를 하며 여러 책을 천천히 조금씩 읽는 나는, 최근 하미나 작가님의 『아무튼, 잠수』를 읽고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시인 데이비드 화이트의 말을 직접 번역해 전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갈라파고스섬에서 2년 동안 제가 한 것은 몇 시간이고 동물과 새들, 풍경을 오래 바라보는 것이었어요. 굉장히 주변에 귀를 기울이는 상태였죠. 그러면서 천천히 깨달은 게 있어요. 내 정체성이 내가 가진 믿음, 내가 만들어낸 믿음, 혹은 다른 사람에게 물려받은 믿음이 아니라 나 아닌 다른 것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느냐에 따라 깊어진다는 것을요. 이러한 지향과 관심이 깊어질수록 내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감각은 더 넓고 깊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 원문 : 시인 데이비드 화이트, 팟캐스트 'On being' 中
* 번역 : 작가 하미나, 『아무튼, 잠수』 138p
지하철에서 이 문단을 읽고 말 그대로 머리가 띵해진 나는, 한참 그 페이지를 눈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문장에 담긴 마음과, 그때 내 마음속에서 일어난 화학작용을 들여다보려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외의 감각들은 차단됐다. 잔잔하게 북적이는 지하철 안, 끄트머리 좌석에 앉아, 무릎에 올려둔 가방의 무게나 부피도 사라지고 그 문장과 나만이 존재하는 시간이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깨닫게 됐다. 나비가 된다는 건, 결국 다시 타인으로 향하는 거구나. 더는 휘둘리지 않는 선명한 자아를 지닌 채로, 나와 다른 것들과 부딪힐 각오를 해야만 이 껍데기를 깨고 나아갈 수 있는 거구나. 나를 확장한다는 건, 나였던 적이 한 번도 없는 세계를 조금씩 흡수하는 일이구나.
그걸 자각하고 나니 번데기 학과 수석이라도 된 양 으스대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러나 다행히 본질을 깨닫고 나면 방법을 알 수 있다. 갓 태어난 고양이라도 제 털을 핥아 깨끗이 하는 것처럼, 저절로 알 수 있었다. 덜 말하고 더 들어야겠다는 걸. 나누기보다 품어야겠다는 걸. 그런 마음을 갖고 나니 미워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하나의 단면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기엔 사람도 세상도 너무 입체적이기 때문이었다. 또, 각자의 시간선이 동시다발적임을 알아버렸기 때문도 있었다. 지금은 서툴더라도 내가 그를 본 건 찰나에 불과하니까. 무엇을 함부로 안다고 말하는 일이 오만하게 느껴졌다.
어느새 생각은 고치 안을 꽉 채워, 껍데기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변화는 고통을 준다. 소중하게 손에 꽉 쥐고 있던 것이 빛을 잃고, 확실하게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흐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줄기의 균열만으로도 변화는 시작되었다. 변화에는 역행이나 유예가 없다. 알아버린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두렵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눈 딱 감고, 반드시 실패할 첫 비행을 시도하는 것 이외에는 주어진 선택지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나아가기로 했다. 늘 그래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