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사랑에 대해 묻다
한강 작가가 8세 때 했다던 질문을 읽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사랑은 무얼까?"* 일주일 내내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아무것도 명확해지지 않아 답답한 기분을 느꼈다. 글 하나를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이 필요한지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었다. 정리된 말이 나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 하며, 작은 조각글들로 책상을 어지럽혔다. 나를 탐구하기 바빠 타인을 살피는 게 서툴었던 나. 그래서 사랑이 참 어려웠다. 사랑에 대해 논하기에는 한참 멀게만 느껴졌다.
복잡한 머리를 가라앉히려 긴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을 맞고 있으려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대의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단 하나의 명제로 결론을 내리려 했었다. 사랑이란, 좋은 것을 해주는 게 아니야. 사랑은 싫은 것을 하지 않는 거야. 선물을 주는 것보다, 배려하는 게 어려운 일이니까. 좋은 것을 주는 마음은 자기만족을 주지만, 상대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건 오직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이런 생각이 따라붙는다. 글쎄,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을 감히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그러면서 언젠가 아버지가 내게 주셨던 반찬통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황태채무침을 커다란 통 한가득 만들어와서는 텅 빈 내 냉장고에 채워 넣고 가셨다. 뭘 이렇게 많이 만들었냐고, 이걸 나 혼자 어떻게 다 먹느냐며 웃었지만, 황태채무침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사랑이 아니라 할 수 있나? 도대체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뭔가? 나는 그 묵직한 반찬통을 받아 들었을 때 느낀 애틋한 마음을 지금 이 순간까지도 선명하게 느끼고 있는데.
모순된 두 명제 모두 참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성숙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싫어하는 것일지라도, 상대는 나를 사랑해서 한 행동일 수 있다. 두 명제는 복잡하게 얽혀 동시에 존재한다. 삶을 단 하나의 명제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근 받아들인 모순되지만 둘 다 참인 명제가 또 있다면, 구원은 '셀프'라는 것. 동시에,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혼자서 충분해야 하지만, 손을 내밀 용기도 내야 한다. 내가 이룬 모든 것에는 타인의 손길이 묻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또 사랑이라고 하면, 내 사사로운 연애사를 통해 깨달은 것들을 논해야 할 것 같기도 하지만, 두려움을 무릅쓰고 거리에 나가 목소리를 낸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 그 가족들이 만들어낸 사람을 지키는 법안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번 달 내 마음에 화살처럼 꽂혀 있었던 문장은 이거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안전법은 유가족이 만든 거야."** 그 문장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저리고 아팠다. 나와 아무 연고도 없고, 앞으로도 얼굴을 마주할 일 없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 아픔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사랑이 아닐까 했다. 아팠던 것은 나로도 충분하니, 제발 아무도 더는 아프지 않게 해 달라는 마음.
사랑이 무엇인지 이제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비록 내가 사랑을 실천하는 방식은 작고 하찮지만. 예를 들면, 아끼는 엽서를 친구에게 보내주는 일. 스무 살에 나이 많은 사람과 연애하지 말라고 오지랖을 부리는 일. 애인과 나란히 걸을 때, 같은 발이 내밀어지도록 몰래 발을 샤샥 바꿔 걷는 일. 속 없는 사람처럼 우스갯소리를 해서 상대를 웃게 만드는 일. 누군가를 알아갈 때, 자라온 환경보다 지금 좋아하는 취미를 궁금해하는 일. 내가 아팠던 얘기를 글로 써서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에게 위로를 전하는 일. 그런 작고 사소한 것들도 사랑이라면 나는 사랑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또, 사랑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 한강, 『빛과 실』
** 정세랑, 『피프티 피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