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방식

한 사람을 자세히 사랑하다 보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도 능숙해진다

by 소정



나는 누가 좋아지면 질문을 퍼붓는다. 야생동물의 마음을 여는 일처럼 조심스럽게 그를 알아간다. 그러려면 관찰도 필수다. 저 사람은 이런 것에 관심이 있구나. 말할 때 이 단어를 즐겨 쓰는구나. 그동안 내가 조금이나마 이해한 사람 중에 비슷한 사람이 있었나 하고 머릿속 인물사전도 뒤져본다. 비슷한 유형이 발견되면, 확인 절차를 거친다. 상대가 끄덕이면 괜스레 뿌듯하다. 고개를 저으면 새로운 유형으로 기록한다. 어둠 속에서 손끝으로 실루엣을 더듬듯 조금씩 모양새를 파악해 간다. 일단 기록을 마친 후에도 머릿속에 기록된 그와 실존하는 그가 너무 다르지는 않은지 점검한다. 파악된 내용이 실제와 아주 비슷해서, 내가 그가 좋아하는 것을 줄 수 있고, 싫어하는 것을 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편안한 존재가 되었으면 한다. 호기심을 부담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그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고, 그가 틀린 부분을 정정해 주면 기꺼이 고쳐 적는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내가 사랑하는 방식을 받아들여주는 사람도 있다.


내 인물사전 속 주요 정보는 사소하고 영양가가 없다. 나는 이력서에 쓰이지 않을 것들을 알고 싶어 한다. 무엇을 좋아하고 어디에서 행복을 느끼는지 알고 싶다. 어떤 취미를 갖고 있고 그 취미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것을 귀엽다 여기고 또 맛있다고 여기는지, 추억의 음식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하다. 새로워도 좋고 나와 같아도 좋다.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보다는, 일을 하며 재미를 느끼는 순간이 언제인지 알고 싶다. 인정욕구를 배제하면 어떤 동기가 나를 움직이는지. 남에게 말한 적 없는 내밀한 꿈이 있다면 무언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며 당황하는 사람도 있고, 기다렸다는 듯 신이 나서 말해 주는 사람도 있다. 어떤 유형이든 알아가는 재미가 있는 건 확실하지만, 나와 비슷한 곳에 관심을 둔 사람과 대화하다 보면 신이 나서 기약 없는 약속을 잔뜩 만들기도 한다. 다음에 내가 애정하는 식당에 같이 가자든가, 전주에 가서 한복을 입고 돌아다니자고 한다든가, 별을 보러 몽골에 가자고 한다든가. 물론 진심이다. 진심이지만, 서로 구체적인 날짜는 잡지 않는 뜬구름 같은 제안들이 퐁퐁 솟아난다.


그러다 보니 인물사전에서 가장 즐겨보는 카테고리는 '좋아하는 것'. 길을 걷다가, 쇼핑을 하다가, 음식을 먹다가, SNS를 보다가도 누군가 이걸 좋아할 사람이 떠오르면 그에게 얼른 가져다주는 것이 내 즐거움이다. 예를 들어, 겉으로는 유능하고 까칠한 팀장님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정이 많고 사랑스러운 J는 세련되고 귀여운 문구류를 좋아한다. 물론 나로서는 디자인 전문가인 그의 미감을 좇아가기 어렵지만, 소품샵에 들러 J가 좋아할 것 같은 스티커나 키링을 발견하면 도토리 모으는 다람쥐처럼 차곡차곡 사모은 후, J와 만나는 날 한꺼번에 준다. 만나지 못한 시간 동안 그를 떠올린 내 애정의 산물이다. 나는 그렇게 아무 날도 아닐 때 주는 선물이 좋다. 그 투박한 선물을 받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J를 보면서 역시 나는 J를 참 좋아해, 하고 그의 다정함에 고마움을 느낀다.


B는 어른스러운 척을 하느라 아무거나 잘 먹는 무던한 사람인 척 하지만 실은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성격에, 달달한 초콜릿 디저트를 좋아한다. B를 위해 맛있어 보이는 디저트가 있으면 미리 한 번 사 먹어본다. 맛이 좋은 것 같으면 그를 집에 초대하는 날 사두었다가 맛보게 한다. 나는 얼른 후식 먹는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고 그에게 비장한 예고를 하기도 한다. 내가 뭐 맛있는 거 사놨거든? 기대해도 좋아. 가끔 취향에 맞는지 눈이 커져서 어린아이처럼 큼직큼직하게 먹어치우는 디저트를 찾아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또 가끔은 그다지 그의 취향이 아닐 때도 있는데, 별말 없이 깨작거리는 모습을 발견한 후 취향이 아닌 이유를 인터뷰하는 것도 즐거움이다. 그 디저트는 내 선에서 처리된 후, 인물사전 업데이트에 기여한다. 사람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나는 절대로 타인을 전부 알 수 없기 때문에 인물사전의 정교화 작업은 평생에 걸쳐 진행된다.


그리고 취향이 뚜렷하고, 뭐든 일단 해보는 추진력과 손재주를 가진 H가 있다. H는 누구보다 나를 멋쟁이로 바라봐주는 친구로, 나를 응원해 주는 건 물론이고 내가 고른 음식이나 물건까지도 칭찬해 주어서 뭐든 더 해주고 싶게 만드는 친구다. 다른 도시에 사는 그를 집으로 초대하는 날에는 내가 가진 가장 좋은 잠옷을 세탁해 말려놓고, 섬유탈취제를 가볍게 뿌려 곱게 개어놓는다. 집에 도착한 H는 새로 생긴 물건이 있으면 만지지 않고 슬쩍 구경한 후, 너는 이런 걸 참 잘 찾는단 말이야, 하고 애늙은이처럼 뒷짐을 진 채 감상을 말해준다. 친구와 멀리 살면 약속마다 여행이 되기 때문에, 체력이 약한 H를 위해 그가 좋아할 것 같은 장소를 모아 효율적인 동선을 짜놓기도 한다. 맏이라 그런지 주는 메뉴대로 잘 먹는 H지만, 입맛 까다로운 내가 새로운 미식 경험을 시켜줄 것으로 은근히 기대하는 점도 귀엽다. 내가 그를 위해 만든 두툼한 프렌치토스트를 먹고 드물게 큰 반응을 보여주었을 땐 요리 명장이라도 된 듯 어깨가 으쓱했다.


어느 날 우연히 한 질문을 마주하게 됐다. "노년이 되었을 때 어떤 모습이고 싶은가요?" 나는 미리 생각해 둔 것도 아니면서 곧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친구 많은 할머니요." 친구 많은 할머니가 되려면 갖춰야 할 것들이 꽤 많다. 일단 몸이 건강해야 한다. 친구를 집에 초대하든, 친구와 어디 놀러 가든 체력이 필요할 테니까. 대화가 나의 내면으로 타인을 초대하는 일이라면, 내 내면도, 내 집도 타인이 머무르기에 편안한 공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면을 가꿔야 하고, 내 집 마련의 꿈도 실현해야 하니 돈도 열심히 벌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아마도 정신과 의사들이 가장 만류하는 질문일 "왜 사는가?"에 대해 답을 얻기도 했다.(왜 사는가를 너무 고민하다 보면 쉽게 우울해진다고 한다.) 5년 후의 나, 10년 후의 나를 상상하는 질문보다, 노년이 된 나를 상상해 보는 질문이 더 근본적인 삶의 방향성과 욕구를 알려주었다. 나는 외롭지 않게 늙고 싶었다. 그래서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계속 다듬고 늦기 전에 표현하면서, 혹시 내 곁이 머무르기에 불편하지 않은지 귀 기울이며 살게 됐다.


타인을 자세히 알아가는 일, 머릿속에 사전을 집필하고 끊임없이 고쳐 적는 일이 언제까지 이렇게 즐거울지 궁금하다. 질리지 않고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내 즐거움에서 그치지 않고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 사전이 그에게도, 타인에게도 읽혀서 내가 발견한 그의 장점과 사랑스러운 구석이 널리 알려졌으면. 그렇게 생각하면 사전이 아니라 신문이 더 어울리는 비유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건 확실한 내 자랑거리다.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 때로는 촌스럽고 유치할지라도, 나는 타인을 사랑하는 내가 좋다. 꼼꼼히 적어 너덜너덜해진 필기노트와 같은 뿌듯함이 있다. 한 명을 아주 자세히 사랑하다 보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도 더 능숙해진다는 점이 신기하다. 사람은 제각기 다 다른데도, 사랑하는 일에 경험치라도 쌓이는 것일까. 그러니 앞으로도 나는 이 사전을 아주 아주 두꺼워질 때까지 계속 쓰고 싶다. 외롭지 않은, 친구 많은 할머니가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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