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순간을 미루지 않기
미루는 습관이 있었다. 해야 한다는 생각을 방구석에 치워두고 모른 척하다 보면, 불편한 마음은 물에 불린 고무 공룡 장난감처럼 불어났다.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완벽한 때가 따로 있는 것처럼 굴 때도 있었겠지만, 실은 그냥 나쁜 습관에 불과했다. 그 습관을 한 번에 다 고칠 수는 없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나중에'라는 단어가 사라진 건, 내가 고등학생일 때의 일이다. 만약 전생이 존재하고, 그때의 인연이 지금의 삶까지 이어진다면, 난 우리 외할아버지와 전생에도 절친이었을 것이다.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어릴 때부터, 나는 무뚝뚝하고 짓궂은(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우리 외할아버지 무릎에 찰싹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고 했다. 좋은 마음에는 이유가 없다. 그냥 좋았다. 할아버지를 무서워하던 몇 명의 손주를 거쳐, 처음으로 품에 안겨 방긋방긋 웃는 아기에게 할아버지는 밀어낼 새도 없이 스며들었을 것이다. 나는 0세에 이미 그의 최애로 등극했다.
내가 유년기를 보낸 집은 외가댁과 매우 가까웠다. 어느 날, 아마 내가 유치원생쯤 되었을 때, 나는 외가댁으로 놀러 가서 요란스럽게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부르고 그의 품에 쏙 안겼다. 할머니가 저녁식사를 준비하시는 동안, 나는 할아버지와 거실에서 부드러운 차렵이불을 무릎에 덮고 TV 앞에 앉아 <동물의 왕국>을 봤다. 할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아프리카의 동물들이 뛰노는 장면을 보며 재잘거렸던 기억은 내 보물과도 같은 추억이다. 창문으로 길쭉하게 드는 해 질 녘 빛에 아직 켜지 않은 형광등, 따뜻한 장판 바닥 위로 꼼질거리던 발가락, 할아버지와 친구처럼 같이 집중해서 TV를 보던 차분히 들뜬 그 기분, 보글보글 소리와 함께 풍겨오던 맛있는 냄새까지. 그건 그야말로 행복의 실체였다.
할아버지는 단연코 내 최애였다. 나는 할아버지를 일주일에 두 번 넘게 만나도, 만날 때마다 몇 년 만에 보는 것처럼 저 멀리서부터 "할아버지!"를 외치며 망아지처럼 뛰어가 그의 품에 콱 안겼다. 나는 할아버지와 거실에서 노닥거리는 시간이 좋았다. 어떤 날은 할아버지의 커다란 귀에서 귓밥을 파냈고, 어떤 날은 담요 덮은 테이블에 앉아 카드놀이를 배웠다. 할아버지와 손녀보다는 친한 친구들 같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너무 나만 예뻐하는 거 아니냐고 이모한테 한 소리 들으시기도 했단다. 그 말을 듣고 할아버지는 뭐라고 하셨다고 했더라. 예쁜데 어떻게 안 예뻐하냐고 하셨던가. 어릴 때 사진만 봐도, 노란 잠바를 입고 할아버지 품에 아기 새처럼 파묻혀 세상 행복하게 웃고 있는 나를 보면 그렇게 좋을까 싶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내 세상은 온통 입시였다.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갈 거라는, 그러면 순탄한 인생이 펼쳐질 거라는 희망이 날카로운 경쟁심과 뒤섞여 있었던 붕 뜬 시기였다. 그쯤에 할아버지가 아프시기 시작했다. 이제는 너무 커버린 내가 달려가 안길 수 없을 만큼 기운이 없으셨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할아버지였지만, 새삼 그가 노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철없고 속없던 그때의 나는 별 깊이 없이, 아무튼 진심을 담아 아프지 마시라고 걱정을 건넸다. 할아버지는 날씨 좋은 가을, 서울에서 기차로 3시간 거리에 있는 우리 집에서 며칠간 휴가를 보내고 가셨다. 그러나 몇 개월 후 그의 건강은 더 악화됐고,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병으로 인한 치매 증상을 얻게 되셨다고 했다.
왜였을까. 왜 나는 아픈 할아버지를 보러 가지 않았을까. 왜 아무도 지금이 아니면 할아버지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알려주지 않았을까. 할아버지의 증상이 점차 나빠지며, 할아버지가 그의 마지막을 돌봐주던 사촌언니에게 자꾸만 내 이름을 부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를 너무 보고 싶어 하신다고 했다. 그때 비로소 나는 마음이 구겨지면서, 죄송함과 조급함을 느꼈다. 그때 나는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었고, 일주일간 치러질 이 시험이 끝나면 당장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기말고사 첫날,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시험을 마저 치르지 못하고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장례식에서 나는 그 누구보다 더 오래, 더 많이 울었다. 할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지 못한 것이 내내 후회됐다. 그렇게 나를 보고 싶어 하셨는데. 그렇게 내 이름을 부르셨는데. 그까짓 시험, 치르지도 못한 그런 사소한 것 때문에 그가 나를 부를 때 얼굴을 보여드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죄송했다. 그래서 펑펑 울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은 내게 첫 장례식, 첫 죽음이었다. 나는 사람이 죽어 하늘로 가게 되면, 아무리 보고 싶어도, 아무리 사정을 빌어도 절대로 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정말 보고 싶어서 딱 30분만, 아니 10분만 내어주면 안 되냐고 사정을 해도 절대 볼 수 없는 것이 죽음이라는 이별이었다.
장례식 마지막 날, 꼭두새벽 미사에 다녀와서 할아버지를 모시고, 다 같이 외가댁에 돌아와 넋이 빠진 채 말없이 앉아있었다. 그때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주 포슬포슬하고 예쁜 눈이 쌓이지도 않고 참 예쁘게 왔다. 우리는 함께 내리는 눈을 보며 할아버지를 느꼈다. 그 눈을 할아버지의 인사라고 느꼈다. 우리가 행복하기를, 사이좋게 잘 지내기를,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해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겨우 수습한 마음을 또 풀어헤치고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가족들의 품이 따뜻했다.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삶이 유한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어떤 사람은 다시는 만날 수 없단 걸 알았다. 그러니 나중으로 미룰 수 없었다. 최소한 사람만큼은 미루지 않으려 했다. 언제가 마지막일지 모르는 거라면, 후회가 남지 않게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지금 좀 부끄러울지언정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마음을 표현하는 일에 모자람이 없게 했다. 차라리 좀 넘치는 게 낫다 싶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나는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눈물을 흘린다. 사후세계에 대한 여러 상상이 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그가 사후세계에서 쓸 용돈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나는 할아버지를 매년 떠올리고, 사랑하고, 그리워하니 그는 하늘에서 아주 씀씀이가 여유로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좀 낫다. 그래도 너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