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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Nov 19. 2024

나답게 살기로 했습니다

출근길에 쓰러진 후, 요가원에 등록하다


첫 직장을 퇴사한 후, 나는 나인채로 가장 잘할 수 있는 직업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발견한 직업이 마케터였다. 무언가를 구석구석 좋아하는 일, 그 좋아하는 마음을 말과 글로 떠들어 알리는 일에 자신이 있었던 내게 천직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마케팅 부트캠프도 듣고, 부트캠프가 끝난 후에는 스터디카페에서 종일 구직 서류를 썼다. 옆구리만 찔러도 면접 답변이 나올 즈음 마음에 드는 직장을 만나 마케터로 취업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좋은 직장은 아니었다. 사람이 중요하고 성장이 중요하다던 회사였지만 그들의 고민은 '사람을 최대 효율로 써먹는 101가지 방법'에 불과했다. 일이 많은 건 버틸 수 있었다. 건강은 상했지만,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 역시 내가 잘하는 일이었다. 누군가 고생을 알아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좋으면, 일은 힘들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사람마저 없다는 걸 입사하고 한 달이 되었을 때 알아버리고 말았다.


알게 된 후에도 곧바로 직장을 그만둘 순 없었다. 나는 나라는 식구를 먹여 살리는 1인가구의 가장이었다. 게다가 같은 업계에서 일을 계속하려면, 내가 이 회사에 들어온 목표를 달성하려면, 1년은 버텨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1년쯤이야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의 얼굴은 나날이 추해졌다. 회사에서 많은 걸 견디고 버티다 집에 돌아오면, 나는 봐주기 힘들 만큼 너덜너덜해진 채 샤워할 기력도 없이 잠시간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찬 바닥에 앉아있곤 했다.


4개월이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죽고 싶다는 생각에 스며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곧이어, 회사가 뭐라고 내 목숨을 버릴 생각을 하나. 삶을 그만둘 게 아니라 회사를 그만둬야지. 그런 생각에 도달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그만뒀다. 당장 내일이 불안하지만(나라는 식구는 입도 짧고 맛있는 걸 좋아해서 식비가 많이 든다.), 그래도 살아 있으면 살아질 거라고 의식적으로 되뇌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어쩌다 그만뒀냐'는 질문에 눈물 없이 담백하게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혼자 시간을 보냈다. 누굴 만나기보다 나를 챙기고 휴식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무엇보다, 조용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 좋았다. 죽고 싶었던 덕에 찾은 가장 내밀한 꿈은 언젠가 내 책을 내고 싶다는 것이었기에, 글을 쓰고 싶어진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동안 나답지 않은 옷을 입으려 했다는 걸, 작은 책방에서 천천히 책을 고를 때마다, 잔잔한 재즈 음악을 틀어두고 글을 쓸 때마다, 북페어에서 가슴 뛰는 설렘을 느낄 때마다 알 수 있었다.


글방 모임에 낸 첫 글은 정말 어렵게 썼다. 써놓고 정말 수많은 퇴고를 거쳐, 초고의 모양새를 까먹을 만큼 많이 도려냈다. 그러고도 부족한 것 같아 부끄러웠던 그 글을 들고 모임에 참석했다. 내 글을 읽는 차례가 왔을 때 목소리가 떨렸던 것 같다. 그 글은 짧았다. A4 1장이 채 되지 않는 분량. 겨우 글을 다 읽자, 예상치 못한 따뜻한 말들이 돌아왔다. 내 글도, 목소리도 참 좋다고. 어떤 삶을 살아오신 분인지 궁금해진다고. 알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글방 모임을 하며 백수로 보내는 시간은 행복했다. 나는 이미 작가가 된 듯 행복한 상상을 잔뜩 했다. 다음에 할 일은 무엇이 됐든 퇴근 시간이 지켜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꾸준히 글을 쓸 수 있었으면, 결국 최종적으로는 글로 먹고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내 첫 책을 은근히 그려보았다. 뭐든 너무 열심히 하고 마는 나라서, 부트캠프 때도 일을 할 때도 밤늦게까지 일에 매진하고 어떨 땐 새벽까지 붙잡고 있기도 했다.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일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지 못한 채 스스로를 괴롭혔다. 그런 나에게 글 쓰는 일은 해방과도 같았다. 일을 목숨처럼 여기던 나를 조용히 달래주었다.


연락이 왔다. 예전 직장 동료였다. 그는 나보다 먼저 퇴사해 다른 직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 삭막한 곳에서 만난 유일한 친구였다. 반갑게 함께 식사를 했다. 실은 요즘 글을 써요. 언젠가 책을 내는 게 제 꿈이에요. 수줍게 털어놓으니 그가 깜짝 놀라, 자신도 출판과 관련한 일을 한다며 언젠가 같이 일해보고 싶단 이야기를 꺼냈다. 그 순간 나는 그가 나와 같은 일을 꿈꾸는 줄 알고 너무 기쁘고 반가워서, 우리가 만난 인연이 참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런 회사였지만 이 분 하나 만난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정말 그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저희 대표님이 이야기를 들으시곤 소정님을 보고 싶다고 하시네요. 아직 취업 전이시면 한번 와보시겠어요? 그 말이 나에겐 큰 위로로 다가왔다. 잘하고 있는 건지 막막한 안갯속 같았는데, 누구 하나라도 알아봐 주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나는 제안을 수락했고, 면접을 거쳐 그 회사에 취업하게 됐다. 규모는 작지만 위치가 좋아 회의실 뷰가 끝내주는 회사였다. 강남, 구로를 거쳐 광화문에 있는 회사를 다니려니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회사 분위기에 맞춰 이른 아침마다 메이크업을 하고 단정한 정장을 차려입은 채 회사를 다녔다.


그 회사는 나에게 달콤한 유혹과도 같았다. 나답지 않게 살면, 그 옷을 멋지게 소화해내기만 하면 부와 명예를 줄 것을 약속하는. 모든 생물의 본능은 삶이다. 그 본능을 역행할 만큼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나답게 살 것을 결심한 나에게, 다시 불편한 옷을 입을 기회가 주어졌다. 한국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정상성'을 답습할 것을 요구받자 두 가지 생각이 충돌했다. 이건 나답지 않단 생각과, 어쩌면 나는 성공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타협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숨 막히는 옷을 잘 소화해 낼지도 모른다고. 마치 그 일이 나를 주름 없이 매끈하게 만들어줄 것 같았다.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숨이 콱 막힌다. 가장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할 호흡 마디마다 갑갑한 감각에 괴로워하게 된다. 회사에서 종일 긴장한 탓에 집에 오면 풀썩 쓰러졌지만, 이상하게 잠에 들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마음이 쉬지 못했다. 퇴행한 것 같았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놓고도 욕심에 휘둘리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광화문은 멀었고, 나는 해가 뜨기 전 집에서 완벽한 모습으로 나와 지하철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다시금 좀비가 되어갔다. 글도 쓰지 못했다. 뻑뻑한 눈으로 몇 번 읽지 못한 책이나마 꾸역꾸역 챙겨 다니는 것만이 내 위안이었다.


어느 출근길, 잠을 거의 자지 못한 상태로 샤워 후 옷과 화장을 갖추고 집을 나섰다. 시간이 조금 빠듯할 것 같아 뛰듯이 걸었고, 지하철에 올라타자 살짝 덥다고 느껴졌다. 코트를 잠깐 벗을까, 생각하던 중 더운 감각은 점차 식은땀으로 바뀌었고, 어지럽기 시작하더니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먹먹하게 멀어졌다. 기둥도 손잡이도 잡지 못하고 서있었던 나는 주저앉을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생각했다. '저 쓰러질 것 같으니 자리 좀 양보해 주세요, 한다고 누가 비켜주기나 할까?' 결국 얼마 못 가 가까운 역에 겨우 내렸고, 의자가 보이지 않아 승강장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가 핑핑 돌고, 아무런 힘이 없었다. 어지럽고 울렁거렸다. 몸은 오싹오싹 춥고 세상이 웅웅 거리는 탓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느낄 여력이 없었다. 와중에 아무도 괜찮으시냔 말을 걸지 않아서 '그래, 여기 서울이었지' 했다. 쓰러지기 직전부터 머릿속은 오직, 회사에 어떻게 이야기하나였다. 출근길에 기절해서 회사에 갈 수 없다고 하면, 꾀병으로 여길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아프고 정신없는 와중에 뭐든 증거로 쓸 사진을 찍었다.(보내지는 않았다.) 회사에 연락할 카톡을 몇 번이고 쓰고 지웠다.


회사에서는 괜찮으시냐며 푹 쉬시라는 연락을 줬다. 이대로 영영 푹 쉬라는 것 같기도 했다. 우선 병원에 들렀다. 의사 선생님은 증상을 들으시더니 '미주신경성실신'이라고 했다. 혈압이나 염증, 다른 질병 등 여러 이유로 발생할 수 있고, 몸이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내린 강력한 조치라고 했다. '정상적'인 사람인 척 나답지 않게 살아가려다, 몸이 정상의 범주를 벗어나다니. 몸이 내게 살려달라 말하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거울 속의 나는 눈에 띄게 창백했고, 혈압은 말도 안 되게 낮았다.


기절도 처음이지만, 이만큼 몸을 혹사시켰던가 싶어서 마음이 복잡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자마자 집을 정돈했다. 그럴 상태가 아니었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한 잠 푹 자고 일어나서는, 다시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마치 그 순간의 내가 진짜 나인 것처럼, 힘들고 지치면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것처럼 그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를 돌봐야겠다는 생각에 건강검진을 받았고, 운동을 하기 위해 요가를 배우자고 결심했다. 실행력이 끝내주는 편이라 건강검진한 당일, 팔에 구멍 하나 난 채로 요가원에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은 오늘 저녁에 방문하시라고 했다.


검진 후 싸늘해진 몸을 덥히며 1시간쯤 잠을 자고, 이제는 완연한 겨울이 된 날씨에 목도리를 두르고 요가원으로 향했다. 집에서 도보로 10분. 요가원은 조용한 골목길에 있었다. 선생님과 방석을 깔고 앉아,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가 추구하는 요가는 어떤 방향인지 설명을 들었다. 이곳의 요가는 몸을 단련하는 운동의 측면만 있지는 않다며, 같은 동작이라도 사람의 몸이 제각기 다른 만큼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된다고 했다. 짧은 대화로도, 이 분이 얼마나 요가에 진심이고 명상과 수련을 해왔는지 느낄 수 있었다.


우선 한 달 등록하기로 하고 서류에 이름과 연락처, 현재 상태를 적었다. 저는 불안이 높아서요. 늘 어깨가 굳어있고 잠을 못 자요. 실은 최근에 기절한 적이 있어서, 저를 좀 돌보고 싶어서 오게 됐어요. 담담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대화하며 마음이 열린 건지 아님 너무 지쳤는지 눈물이 울컥 나왔다. 선생님은 같이 애달파하면서, 울어도 괜찮아요, 여기 와서 우시는 분 많아요, 많이 힘들었겠어요 하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실은 제가 저에게 맞지 않는 옷에 저를 끼워 맞추려 했었어요. 그런데 그걸 그만두고, 저답게 살고 싶어서요. 글을 쓰다 보니 마음이 편해졌고, 앞으로도 글을 쓰며 살고 싶어요. 선생님은 눈을 반짝이며 작가셨구나 했다. 누군가에게 작가로 불린 첫 순간이었다.


선생님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자신도 예전엔 완전히 다른 업계에서 바쁘게 일했고, 늘 어깨가 굳고 잠을 자지 못하는 긴장 상태에서 살아갔다고. 그러다 어떤 계기가 생겨 삶을 돌아보게 됐고, 요가를 만나게 됐다고 했다. 사람에게는 진짜 '나'와 '에고'가 있는데 나와 에고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마음이 힘들어진다며, 처음 그 거리를 자각한 순간은 괴롭지만 결국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니 지금 그 과정을 겪고 있는 내가 참 현명하다고 했다. 나를 잃은 채 에고만 갖고 사는 사람들은 늘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모든 순간이 지옥일 수밖에 없다고.


나는 또 덧붙였다. 저도 저 다울 때 가장 행복해요. 그런데, 그게 제가 남들이 말하는 '정상성'에서 탈락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거기에서 도망친 일을 합리화하는 걸까 봐요. 선생님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불안할 수 있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잘 가고 있어요. 나를 알고 나답게 사는 건 지혜로운 거예요. 나는 그 말에 또 울컥, 눈물이 나는 것을 도저히 누르지 못했다. 인복을 완벽한 누군가를 만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내게 인복이란 필요할 때 필요한 이야기를 해주는 한 순간과의 만남이다. 선생님은 내게 손을 잡아도 되겠냐 물었고, 눈물 묻은 손으로 조심조심 잡은 손은 따스했다.


요가원을 나서며 선생님, 저 포옹 한 번만 해도 될까요? 하니 그럼요! 하고 반가움에 반짝이는 그의 눈빛에 또 위로를 받고, 직접 따오셨다는 단감 두 알을 받아 양쪽 주머니에 하나씩 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기분 좋은 겨울 공기를 마시며, 파노라마처럼 한 해의 기억을 돌아보았다. 너무 열심히 하려다 나를 지키지 못했던 수많은 시간. 나에게 맞지 않는 옷에 나를 끼워 맞춘 우스꽝스러운 모습들. 그리고, '나'와 만나고 나다운 일을 만난 소중한 시간까지. 깎이고 깨지는 과정은 너무 아팠지만, 그 덕에 나답게 사는 삶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면 그 모든 일조차 감사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초라해 보여도 상관없다. 나는 계속해서 글을 쓸 것이고, 나답게 살 것이니까. 그러다 보면 반드시 행복할 거고, 단단해질 거고, 내 책이 나올 것이다. 어떤 눈물은 슬퍼서 흐르는 눈물이 아니다. 마음속에 굳어있던 것이 녹아 나오는, 불순물을 씻어내는 눈물이다. 올해는 눈물로 마음을 씻어낸 해였다. 시야가 깨끗해지니 더 많은 게 보인다. 직접 부딪혀보지 않으면 모르는 내게, 다양한 옷을 직접 입어본 올해만큼 좋은 경험이 또 어디 있을까. 덕분에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됐으니, 죽지 않고 견뎌낸 스스로에게 고맙고 미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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