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부터 사들인 오늘밤이 우스갯소리가 되기를
2024년 12월 3일 화요일 밤,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핸드폰에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느긋하게 차를 한잔 우려내어 책상 앞에 앉아있던 나는, SNS에 접속했다가 그 사실을 알았다. 세상이 불안으로 가득했다. 나는 서울에 혼자 살고 있고, 어디 도망갈 곳도 없었다. 지방에 있는 본가에라도 내려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우선 라면을 샀다.
빛바랜 뉴스들이 떠올랐다. 한국인들은 나라가 불안하면 라면을 사서 쌓아두었다. 그냥 그것부터 생각이 났다. 라면과 물, 생리대, 휴지, 물티슈를 샀다. 사지 못하게 되거나 가격이 오르면 어떻게 하나 싶었다. 더 대량으로 쟁여두어야 하나 하다가 말았다. 열흘 정도는 버틸 수 있는 양으로 우선 충분할 것 같았다. 과한 걱정일지도 몰라, 아님 이것들을 다 버리고 떠나야 할지도 몰라. 그런 생각에 우선 이만큼만 장을 봤다.
단 며칠이라도 집에 콕 박혀 나가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물건을 사두니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도심에는 탱크가 돌아다니고 있다고 한다. 집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이다. 바깥이 이상할 만큼 조용하다. 쉬익, 닫힌 창문 너머로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가 유독 섬찟하게 들린다. 예전에도 비행기가 지나갔던가 싶다.
며칠 뒤에 만나기로 한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우리 금요일에 어떻게 할까. 너무 무섭다. 친구도 말한다. 그러니까, 정말 우리 어떻게 하냐. 너무 화가 나고 무서워. 우린 그냥 느긋하게 맛있는 음식에 술 한잔을 마시며 영양가 없는 얘기를 나누려 했을 뿐인데. 평온한 일상이 급격히 무너지고 말았다.
가족 생각이 난다. 아버지 생각이 난다. 딸의 비빌 언덕이 되어주려 늦은 나이까지 일하고 계신 아버지. 날이 추운데. 만약, 혹시라도, 만약에 하나, 정말 큰일이 벌어져서 세상이 끝나게 된다면 그 마지막을 나는 누구와 보내게 될지 생각한다. 당장 짐을 싸서 아버지 곁으로 가는 상상도 해본다. 내 집, 내 물건이 단단히 제 자리들을 찾아 눌러앉은 이 공간을 떠나는 생각만으로 슬픔이 밀려온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산다고 하면 '자취'하시는구나, 한다. 혼자 사는 삶은 온전한 삶이 아닌 것처럼. 잠깐 스쳐가는 떠돌이 생활인 것처럼. 그런데 이런 삶이 내 삶이라면. 내 삶은 이렇게 스스로를 보살피는 삶, 스스로를 구원하는 삶일지도 모르지 않나. 이대로 삶이 끝난다 하더라도 후회되지 않을 만큼 이미 그 자체로 온전한,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일지도 모르지 않나.
실은 나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한 달은 버틸 만큼의 식료품과 생필품을 잔뜩 쌓아두지도, 당장 짐을 싸서 떠나지도 못한 채로 딱 열흘 치의 물건을 쟁여두었나 보다. 수습되지 못한 불안의 매무새를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글에 옮겨 담고 애써 잠을 청한다. 겁이 난다. 무섭다. 이렇게 끝나는 건 싫다.
2회 차 마우스북페어에 다녀온 얘기를 쓰고 싶었는데. 3회 차에는 내 책을 내서 창작자로 참여하고 싶었는데. 계속 꿈을 꿀 용기를 만났는데. 이제야 '나'를 만나, 나로서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은데. 그러니 부디 이 밤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내가 라면부터 사들였던 오늘밤이 우스갯소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종교도 없이, 눈을 꾹 감고 기도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