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포트폴리오를 만들면서 든 생각
돌아보니 5년 차가 되어 있었다. 연차에 대해 큰 생각이 없기도 했고 새롭게 주어진 걸 배우고 익히느라 바쁘기도 했고 앞만 보고 달리느라 숨이 차기도 했다. 이런저런 핑계로 해왔던 일, 걸어왔던 길을 뒤돌아볼 새가 없었는데 어느새 5년 차라는 적지 않은 시간의 무게가 정지 신호를 보내줬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일했고 앞으로 무엇 때문에 일을 했는지 돌아보라는 신호였다.
와디즈에서 20대의 절반 이상을 보냈다. 스물셋에 처음 인턴으로 들어와 일하고 졸업하기 위해 떠났다가 2년 후 다시 들어왔다. 시간을 세는 것만큼 무의미한 게 없다 싶다가도 시간만큼 의미 있는 게 어디 있을까 싶다. 사람들이 자주 물었다. 지겹지는 않은지, 어떻게 한 스타트업에 그렇게 오래 있는지, 어떤 일을 했고, 무엇을 배우고 있는 건지. 때마다 그럭저럭 한 대답을 드리긴 했지만 완벽히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러게 이 애틋한 회사에서 나는 무슨 일을 했을까. 또 어떤 일을 하고 싶은 걸까. 나는 왜 일을 하는 걸까.
미래를 그리려면 과거를 돌아봐야 한다. 그래서 2014년, 우리의 첫 만남을 기억하며 쓴 글을 다시 살펴봤다. 다시 입사한 후 3개월 차 때 쓴 글. 초심을 떠올리고 싶을 때마다 들춰보려고 쓴 글인데 역시 이럴 때 도움이 된다.
그리고 처음으로 포트폴리오라는 걸 만들어봤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그리고 귀찮... 1월에 쓰기 시작해서 3월에 마무리하는 의지의 나^^) 내가 했던 일을 간결하게 정리하는 건 물리적으로 어렵기도 했지만 심적으로도 쉽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있는 건가..? 과거의 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일을 했단 말인가. 자괴감과 셀프 모멸감 때문에 정리하다가 멈추길 여러 번 반복했다.
동시에 나름대로 참 열심히 살았구나 싶었다. 글도 쓰고, 책도 내고, 디자인도 하고, 영상도 하고, 문자도 보내고, 뉴스레터도 꾸미고 뭐 다 했다. 여기에 두 번의 큰 IMC 캠페인까지 진행하고, 광고도 돌려보고, 기획전의 늪에 빠져도 봤다. 깨알 같은 일들이 모여, 그리고 그걸 부지런히 해치운 덕에 지금의 내가 있었구나. 부끄러운 순간은 그때였고, 비로소 그간의 시간을 정리한 후에 남은 건 뿌듯함이었다. 몇 번의 휘청거림과 좌절에도 끝내 무너지지 않은 튼튼한 내 다리와 마음에게 고마웠다.
지금의 내가 어떤 마케터로 성장했는지를 적어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누군가 봤을 때 '어..? 쟤가 저렇다고..?' 할 만한 꼬투리가 잡히지 않을, 나에게 떳떳한 내용만을 적어보자고 생각했다. 여러 키워드들을 노트에 쓰고 열심히 여과시킨 뒤 남은 것들만 골라서 썼다. 이 내용을 거울 삼아 앞으로도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이 모습들만은 잃지 않기로 다짐하며 말이다.
포트폴리오를 만들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건 내가 이 일을 선택한 이유가 되어준 니체의 문장.
지금의 사회구조는 영원히 바뀔 수 없다는 생각,
인간의 본성은 이미 결정되어 있어서 바뀔 수 없다는 생각들이
인간을 체념적이고 수동적으로 만드는 담벼락이다.
여전히 이 문장이 주는 울림은 여전하고, 앞으로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변화의 방식이 좀 더 구체화되었다는 거?
5년을 돌아보니 일단 재미있었다.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는 다이나믹함! 매년 빅이슈가 있었다. 일이 손에 익었다 싶으면 다른 팀으로 이동했고, 또 익숙해졌다 싶으면 큰 프로젝트가 생겼다. 와 이걸 어떻게 하지? 싶었던 일도 하다 보면 오 이게 되네?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능력 있는 팀원들과 함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과 함께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를 갖고 티키타카를 하면서 빌드업하고, 실행하며 성과를 만들어가는 재미도 알았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어디서 일해요?"라는 질문에 '아 그게 저..'라고 설명하려고 드릉드릉거렸던 과거부터 '저 와디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지금까지, 성장하는 회사를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다는 기대감(?)도 한몫한다. 요즘 또 하고 싶은 게 많아서 머릿속이 핑핑 돈다. 진정해 짝 진정해 짝
'앞으로'라는 단어가 붙긴 했지만 이 회사를 선택했던 이유도,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꿈꾸는 이유도 사람들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그 방향이 조금 더 뚜렷해진 것일 뿐.
앞으로도 나는 커뮤니티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 단순히 사람을 모으는 커뮤니티가 아니라 모인 사람들이 이 세상을 단 1cm라도 아름답고 다정하게 만드는 것에 보탬이 될 수 있는 힘을 가진 커뮤니티. 그로 하여금 새로운 사람들이 영감을 얻고 동참하고 싶어 하는 그런 커뮤니티. 일단 지금 우리 브랜드에서 만들 수 있는 커뮤니티가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곳에서 꼭 감화력을 가진 커뮤니티를 만들어보고 싶다.
또 만들어보고 싶은 것들도 많다. 작년 말, 몸과 마음이 무너지는 시기를 겪으며 심신을 동시에 단단히 할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심리 치료를 결합한 눔 같은 서비스. 지금은 이런 서비스들이 여러 가지 나오고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이 있지 않을까 싶다. 몸과 마음을 함께 챙겼을 때 우러나오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경험하고 공유해보면 너무 즐겁겠다는 상상을 하면 생각만으로도 즐거워서 몸이 들썩거린다.
아주 나중에, 마케팅과 브랜딩을 더 열심히 배우고 나서는 오랫동안 염원해왔던 '더 나은 교육 환경'을 만드는 일도 해보고 싶다. 학창 시절을 울릉도에서 보내면서, 그리고 여전히 그곳에서 자라고 공부하는 조카를 보면서 그때의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불평등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커지고 있다.
어릴 때는 나 혼자 세상을 충분히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모하고 건방지지만 그런 생각으로 계속 부딪혀온 내 모습이 나쁘지만은 않다. 앞으로는 비슷한 생각하는 하는 사람들과 함께 너무 오랫동안 문제로 자리 잡혀 있어서 사람들이 문제라고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바꿔나가고 싶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속이 시원하다. 걸어가야 할 길을 깨끗이 치워둔 느낌. 샛길로 샐 수도 있고, 유턴을 할 수도 있지만 뭐 어떤가. 길은 내가 가는 곳으로 나기 마련이니까 일단 네비 찍고 가본다. 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