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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이 Sep 19. 2024

기브앤테이크 더 기타

여름 정기 공연에 쓸 기타가 필요했다. 거의 5-6년 전 친구들에게 생일 선물로 사달라고 요청해 받은 기타가 있었지만 관리가 소홀했고 또 10만 원대의 중국산 기타여서 소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내 기타 실력이 근본적인 문제임을 모르지 않았으나, 한달도 채 남지 않은 시간에 실력을 눈에 띄게 높이기는 어려웠으니 장비로라도 부족함을 메꿔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덜컥 새 기타를 사자니 겁이 났다. 다음 공연 때도 어쿠스틱 기타를 계속 쓸 수 있을지도 만무했고, 4-50만 원 대 기타를 좁은 집에 들여놓고 제대로 관리도 못하면서 괜히 신주단지 모시듯 애만 닳을 게 분명했다. 물건을 잘 관리하고 아끼지 못하는 내게는 고역 같은 일이었다. 솔로 구간이 있었는데, 내 기타로는 소리가 영 예쁘게 나질 않았다.~

오랜만에 당근 앱을 켜보았다. 기타 라고 검색하니 일렉부터 어쿠스틱, 베이스까지 각종 기타들이 나 데려갑쇼 하고 일렬로 진열되어 있었다. 픽업(앰프와 연결할 수 있는 커넥터)이 장착되어 있는 것, 연식이 오래 되지 않은 것, 믿을 만한 브랜드일 것, 생각해둔 몇 가지 조건들로 필터링하니 동네에선 2개의 선택지만이 남았다. 네이버와 유튜브에 2가지 모델명을 검색해 열심히 비교해보았다. 둘다 전문가에게 꽤 호평을 받은 브랜드여서 고민하는 데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어느 주말이었다. 느즈막히 일어나서 가만히 앉아있는데 문득 공연이 2주 앞으로 다가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내 얼음샤워를 한 것처럼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나는 왜 항상 코앞에 일이 닥쳐야 움직이는 걸까. 스스로를 채근하며 바로 집에서 더 가까워보이는 판매자에게 연락을 했다. '기타 오늘 저녁에 구매할 수 있나요?'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린지 10분이 되었을까. 채팅창에 '읽음'이란 표시가 떴다. '네 근데 제가 오늘 저녁에 지방으로 내려가야 해서 입금해주시면 저희집 문앞에 두고 가겠습니다.' 판매자의 지난 거래 내역도 꽤 있었고 온도도 낮지 않았지만 사기는 내가 당하면 100%이기 때문에 끝까지 방심은 금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 30분 내로 갈 수 있는데 바로 거래 가능하실까요?' 메세지를 보냈더니 바로 '알겠습니다. 이따 뵈어요.' 라는 채팅이 날아왔다. 

판매자의 거주지는 도보로 20분 정도 걸리는 아파트 단지였고, 나는 후루룩 양치와 세수를 마친 후 옷을 갈아입었다. 출발하겠다는 채팅을 보내려는 순간, 먼저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런데 계좌이체 한도 때문에 현금으로 주실 수 있을까요?' 당장 가진 현금 36만 원은 없었기에 근처 은행을 찾아봐야 했다. 지도 앱을 켜고 기업은행 ATM을 찾아보는데 이 동네에는 왜 새마을금고와 우리은행 투성이인지. 하필 계좌가 없는 곳들이어서 난감했다. 다행히 판매자 집 근처에 ATM이 하나 있어서 '현금 인출이 필요해서 10분 정도 늦을 것 같습니다. 근처 도착하면 연락드릴게요' 라고 답한 뒤 후다닥 집을 나섰다. 

마침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시간이었다. 도보로 20분을 걸었다간 발바닥이 녹아내릴 게 분명한 한낮이어서 망설임 없이 카카오바이크를 탔다. 페달을 구른지 5분도 안되었는데 이마에서 등에서 땀이 쏟아졌다. 시간이 촉박했다. 거래 시간도 거래 시간이었지만, 오후에 풋살 친선전이 잡혀 있어서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가는 길은 자전거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지 않아서 몇 번이고 자전거를 탔다가 끌었다가를 반복해야 했다. 겨우 ATM 기기 앞에 도착해서 인출을 하려는데 이상한 메시지가 떴다. '현금 인출을 하려면 은행 인증이 필요합니다' 같은 메시지였다. 요즘 ATM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안되겠다 싶어 다른 지점을 찾아 달려갔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벌써 10분이 지났다. 판매자에게 다시 연락했다. 'ATM 인출이 안되어서 방법을 찾고 있어요. 10분 정도 더 시간을 주실 수 있을까요?' 간절했다. 다행히 판매자는 너그러이 양해해주었다. "그래 요즘 같은 세상에 현금으로 30만 원 요구할 거면 이정도는 기다려줘야지" 한 손으로는 햇빛을 막고, 한손으로는 현금 인출 방법을 검색하여 꿍얼꿍얼거렸다. 

검색해보니 편의점 ATM 에서 카카오뱅크로 돈을 인출할 수 있었다. 역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근처에 널린 게 편의점이었기에 가장 넓은 편의점으로 갔다. 그러나 무너질 하늘이 남아 있었다. ATM 기기가 없는 편의점이었다. 옆의 편의점도, 그 옆의 편의점도 상황은 같았다. 세상이 나를 속이는 것만 같았다. 지푸라기를 붙잡는 심정으로 판매자에게 연락을 했다. '제가 은행 ATM기로 인출이 안되어서 편의점 ATM 기를 찾으러 돌아다니고 있는데 찾을 수가 없네요.. 혹시 이체 가능한 계좌는 없으실까요ㅠㅠ' 안면도 트지 않은 상대에게 ㅠㅠ 같은 이모티콘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저것은 진짜 내 눈물을 표현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읽음 표시가 꽤 오래갔다. '네 다른 계좌로 받아 볼게요' 유레카! 진작에 그 계좌를 말씀해주실 순 없었나요? 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어쨌든 된다는 게 어딘가. 기쁜 마음으로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 거래하기로 한 곳까지 신나게 내달렸다.

아파트 정문을 지나 자전거를 이끌며 두리번 두리번 거리고 있는 나에게 한 남학생이 다가왔다. '저기요' 기타를 든 친구는 고등학생처럼 보였다. '당근..?' '네 맞아요! 제가 너무 늦었죠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기타 먼저 봐도 될까요?' '네' 사진에서만 봤던 영롱한 기타를 품에 들었다. 줄이 녹슬어 있긴 했지만 기타 바디는 게시물에 올라왔던 그대로 상태가 좋았다. '기타 아직 좋은데 왜 파시는지 여쭤봐도 돼요?' '아.. 갖고 싶은 기타가 생겨서요..' '아! 판매 내역 보니까 기타 많이 갖고 계시더라고요. 좋아하시나봐요!' '아 네..' 쑥스럼이 많은 친구였다. 매물을 확인했으니 값을 치를 차례. 

'계좌번호 알려주실래요?' '네 토스뱅크...' '입금 됐나요? 제한있다고 하셔서' '네 잘 입금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잘쓸게요 감사해요!' 

쿨 거래였다. ATM을 찾아 헤맨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옷은 이미 땀으로 물들고 기타를 맨 어깨는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집에 도착해 기타를 쳐보니 갖고 있던 기타보다 넥이 두껍고 줄 간격이 높아서 코드 잡기가 더 어려웠다. 그러나 소리는 확실히 좋았다. 더 풍성하고 깊은 소리가 났다. 만족스러웠다. 다음날 튜닝샵에서 기타 줄도 새로 싹 갈고 높이도 조절했다. 훨씬 편해졌다. 이제야 내 것이 된 느낌. 매일 퇴근하고 돌아와서 2시간이 넘게 연습을 했다. 왼손의 두번째 세번째 손가락엔 딱딱한 굳은 살이 배였고, 오른손 손목이 저릿했지만 신이 났다. 좀더 커진 크기에도 익숙해졌고 소리도 점점 맑아졌다. 

공연 사흘 전, 인스타그램으로 들어온 DM 요청을 보았다. 어제 온 메시지였다. 은행과 회사 메신저 앱 알림만 빼면 다 꺼두어서 하루 늦게 본 것이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다름아닌 기타의 원래 주인이었다. 거의 편지나 다름없는 길이에 무슨 일이지 싶어 놀란 마음으로 읽어내려갔다. 요는 이랬다. '나에게 판매한 기타는 아버지가 처음 선물로 주신 기타였는데, 그것을 자기가 멋대로 팔아버려 아버지가 많이 노하셨다. 이렇게 화를 내실 줄 몰랐는데 아버지와 사이가 소원해져서 다시 기타를 돌려받고 싶다' 꼬질했던 친구를 데려와서 샤워도 시키고 옷도 새로 갈아입혔는데 다시 내놓으라니! 억울하기도 했지만 순한 곰 같았던 학생의 모습과 아들에게 첫 기타를 선물해준 아빠의 마음, 그런 아빠를 속상하게 해 기가 한껏 죽었을 아들의 마음을 생각하니 돌려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게도 공연이라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답을 보냈다. '아이구 많이 놀라셨겠네요. 그런데 제가 금요일에 공연이 있어서 이 공연만 끝나고 돌려드려도 될까요?' 학생은 공연 후 주말에 찾으러 오겠다고 답해주었다. 

그후로 어쩐지 새로운 기타가 더 애틋해졌다. 예정된 이별, 그럼에도 펼쳐야하는 최고의 공연. 서사가 더해지니 더 간절해졌다. 손목이 찌릿한 빈도가 높아졌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길지 않으므로 새벽까지 연습에 매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금요일이 되었다. 1년 전쯤, 보컬과 베이스로 무대에 오른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 베이스로 연주했던 곡은 학교 종이 땡땡땡 만큼 쉬운 곡이었다. 이번 곡은 역시나 고난이도까진 아니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음을 빠르게 연주해야 했고, 또 기타 솔로로 마무리해야 하는 곡이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긴장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팀의 차례가 되었다. 다행히 첫 곡과 두번째 곡은 잘 끝났다. 보컬로만 참여하는 세번째 곡도 한 번의 삑사리가 있었지만 심각하진 않았다. 마지막 곡을 연주할 시간. 1절에서는 보컬로, 2절에서는 기타 연주로, 마지막 부분은 보컬과 기타 연주를 함께 해야하는 곡이라 가장 떨렸다. 1절 보컬도, 2절 기타 연주도 무사히 넘어 마지막 솔로 구간. 내가 그토록 고대했던 클라이막스. 바로 이 시간을 위해 주말에 자다 일어나자마자 판매자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한낮의 땡볕도 불사하며 자전거 페달을 밟고, 동네 ATM기를 다 뒤져가며 겨우 기타를 손에 넣어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 오직 이 순간을 위해! 

보통의 청춘 드라마에서는 이런 서사가 빌드업되면 주인공의 부족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기적처럼 완벽한 무대를 선보이는 것으로 에피소드가 끝나지만, 현실은 아마추어에게 냉혹했다. 소리는 연습 때보다도 못했다. 관객에게 들리기는 했을까? 당혹한 내 표정 만큼이나 황당했을 것이다. 벌개진 얼굴로 무대 앞을 보니 놀러온 동생이 입을 활짝 벌리고 한껏 조롱하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아쒸' 그렇게 무대에서 내려왔다. 아쉽긴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8마디의 솔로를 위해 바꾼 기타, 새벽까지 열심히 연습한 시간은 완벽한 무대가 아니라 완벽하지 못한 무대에도 떳떳할 수 있는 자신감을 위한 것이었다. 인생의 재미와 설렘이 예전 같지 않아 서글펐던 내 서른 셋의 여름날에서 오랜만에 도전과 떨림으로 빛난 시간이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일요일. 이번엔 우리 집 근처에서 판매자 학생을 만났다. 역시나 바깥은 뙤약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학생은 고맙다고 인사하며 기타를 건네 받았다. 나는 계좌를 알려주고 다시 돈을 돌려 받았다. '조심히 가세요! 아버지 화 풀어주시구요!' '네 감사합니다.' 앞으로 이 기타에 또 어떤 이야기가 쌓여 갈까. 궁금하지만 이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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