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8월부터 끈덕지게 날 괴롭힌 사건이 있다. 뉴스에서만 봤던 전세사기. 집주인이 돈을 들고 나른 건 아니지만 어찌됐던 준다고 해놓고 아직까지도 안주고 있으니 사기나 다름없다. 시간이 꽤 지난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무슨 멘탈로 버텼는지 모르겠다. 1억이 넘는 돈인데 당시엔 이상할 만큼 평온했다. 사건을 제대로 직시하고, 장기적으로 미칠 여파를 하나하나 계산하면 미쳐버리고 말 거라는 본능의 결계였는지도 모른다.
이사가는 날에 맞춰 보증금을 내어줄거라는 집주인 아니 사기꾼의 말을 덜컥 믿고, 더 웃돈이 필요한 새로운 집을 설레는 마음으로 계약했으나 이사 2주 전쯤, 갑자기 보증금을 돌려주기 어려우니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취소할 수 없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이게 무슨 두꺼비집 옮기는 것도 아니고 장난하나 이 아저씨가. 열받아서 욕 한 바가지 쏟아붓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이 나라는 돈 쥐고 있는 사람이 왕이라 혹시나 핀트가 상해 줄 돈도 안 줄까 싶어 있는 예의 없는 예의 끌어모아 계약금을 이미 입금해서 취소는 어렵다는 사정에 읍소해보았으나 돌아오는 건 ‘돈없다’는 뻔뻔한 말 뿐이었다.
내가 네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네 집 빌린 대가로 맡겨둔 내 돈 달라는 건데 마치 지 돈인 것처럼 지금 돈 못 줘. 당당히 말하는 기세가 참으로 어리둥절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이런 천벌받을 짓을 저질러놓고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단 한 마디의 미안하다는 사과도 없이 저렇게 안하무인의 태도로 뻗댈 수가 있을까. 놀라운 건, 이런 작자의 이딴 행태에 가할 수 있는 처벌이 없다는 사실이다.
일단 400여 만원의 비용을 들여 보증금 반환 소송을 하고 이겨도 집주인이 돈 없다고 하면 이 자식에게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심지어 소송에서 이기고 소송비 반환 소송을 걸어도 이 자식 통장에 넉넉한 돈이 없으면 박을 수 있는 방법은 역시나 없다. 그러니 나 역시 악에 받칠 수밖에 없다. 경매를 하더라도 내가 니 새끼 평생 신용불량자 만들어주겠다는 심정으로 200에 가까운 비용을 더 들여 통장 압류는 시켜놓았지만 이미 그의 통장은 텅장이었다. 우물을 파도 파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날 더 고통스럽게만 만들 뿐이었다.
너무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씻을 길이 없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왜 저 자식은 맨날 카톡 프사나 바꾸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같은 개소리나 적어놓으면서 사는 거냐고 한탄을 늘어놓았다.
“엄마 인생이 이렇게 불공평해도 되나? 나는 지옥인데 왜 가해자는 잘 살아? 나 열받아 죽겠다 진짜.”
어리광 부리듯 말했지만 문장문장마다 애타는 마음이 담겼다. 적지 않은 나이를 먹은 만큼 의젓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지만 집주인도, 법도, 비용을 지불한 변호사까지 내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상황에 이르니 도둑이 이리저리 헤집고 간 집처럼 마음이 심히 어지러웠다. 이래저래 뒤집힌 속을 한껏 털고 나니 오히려 더 울화통이 치밀러오르고 억울해지기까지해서 목소리가 떨리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 내게 늘 그렇듯 엄마는 덤덤하게 말했다.
“괘안타. 이것도 다 경험이다.”
이렇게 써놓고보니 다른 사람에게서 이 말을 들었다면 그와 연을 끊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말은 산전수전공중전을 몇 번이나 겪은 엄마에게서 들으니 오히려 위안이 됐다. 그래서 순순히 그런가? 원래 경험이 이렇게 돈이 많이 드나? 하고 되물었다. 엄마는 갑자기 푹 기가 꺾인 내가 웃겼는지 호탕한 웃음 소리를 지르더니
"그래 열 받을 거 없다 다 경험이다 다 돈주고 하는 거다. 값진 경험이 왜 '값진'다 카겠노. 값을 내니까 그런 거다. 그래도 지금 돈 벌고 있을 때 이런 일이 생겨서 얼마나 다행이고? 운 좋은 거라 생각해야지."
"그건 그런데.. 너무 속상하잖아. 엄마도 속상하고 나도 속상한데 그 사람은 잘만 사는 것 같으니까 열불이 터진다."
"니 누구 미워하면 그거 다 다시 돌려받는다이. 누구 지옥에 보낼라 하면 니도 같이 가야되는 거다. 순리대로 살아라. 할 수 있는 건 하고, 마음대로 안되는 건 흘려 보내고."
순리대로 사는 것. 엄마에게 사는 게 녹록지 않다고 한탄할 때면 항상 이 말이 돌아왔다. '순리대로 살아라.' 순리가 도대체 뭔지 여러번 물어도 늘 같은 답이었다. 흐르는 대로 사는 거지. 그건 허무도 냉소도 아닌 '받아들임'이었다. 내가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만을 묵묵히 해내는 것. 그게 엄마가 알려준 삶의 지혜였다.
통화를 끊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지옥에 보내고 싶은 마음 자체가 내 마음을 지옥에 가두는 일이었다는 걸 알게 되니 얼른 탈출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집주인의 불행을 비는 일은 관두기로 했다. 소송도 했고, 경매도 신청했고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마쳤으니 이후의 일은 이후의 시간과 이후의 나에게 맡기기로. 나의 순리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최선을 다하면 어떻게든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것을 엄마가 당신의 삶으로 증명해보였으니 나도 그것을 믿어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