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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이 Aug 22. 2017

항쟁은 열흘이었지만 고통은 37년이다.

나에게 5월의 의미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본 이후부터였다. 내가 헬기 소리를 무서워하기 시작한 건. 영화 속 그 장면 역시 뚜렷이 기억난다. 영문도 모른 채 헬기에 올라 어디로 가냐고 묻는 부하의 말에 상관은 북한으로 간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그 헬기의 종착점은 광주였고, 총검을 든 군인들은 광주시민을 학살했다. 그 영화를 본 이후부터 나는 헬기 소리가 들릴 때마다 반사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져온다. 혹시나 혹시나 싶은 마음이 들면서 머리 뒤부터 발 끝까지의 신경이 순간 긴장해 뻣뻣해진다. 



출처 : 네이버 영화 <화려한 휴가> 스틸컷



한 달 전에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소년들이 소녀들이 청년들이 살기를 한껏 품은 총칼 앞에 무참히 쓰러져가는 이야기. 누군가는 숨기기에 급급했고 누군가는 알리기 위해 목숨을 바쳐야했던 그 날의 광주. 마치 내가 그 곳에 있었던 것처럼 생생히 그려놓은 소설 아닌 소설을 읽으며 몇 번이고 울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그 날 그 곳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었을까. 사랑하는 연인을 보내야했을까. 그들을 남겨두고 떠나야했을까. 둘에게만 의지하며 살아갔던 누나와 남동생이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떨어져 죽어가던 부분에서는 내 남동생이 생각나서 몇 번이나 읽던 것을 멈추고 눈물을 흘려야 했다. 


두려움을 견디며 나는 누나를 생각했어. 이글거리는 태양이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팽팽히 기우는 것을 보면서, 뚫어지게 내 얼굴을, 감긴 눈꺼풀을 들여다보면서 누나를, 누나만을 생각했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느껴졌어. 누나는 죽었어. 나보다 먼저 죽었어. 혀도 목소리도 없이 신음하려고 하자, 눈을 대신 피와 진물이 흘러나오는 고통이 느껴졌어.


<소년이 온다> p.50


이 처절하게 잔인한 이야기가 정말 잘 쓰여진 소설이기만 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힘겹게 힘겹게 넘겨야 했다. 그리고 오늘, 하늘이 청명한 5월만큼 푸르렀던 오늘 영화 <택시운전사>를 봤다.


한 때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가 일제강점기에 살았더라도 변절하지 않았을까? 내가 그 날 광주의 계엄군이었더라도 학살에 가담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고민하며 주제 넘고 어리석고 잔인하게도 인간적으로 가해자들을 이해하려 들었던 적이 있다. 피해자들에게 이 따위 질문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같잖게 그들을 이해하려했던 내 알량한 양비양시론이 학살로 평생을 덮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할 사람들에게 한 번 더 못을 박는 일임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사연 없는 사람은 없었다. 제 목숨 귀하지 않은 사람도 없었고, 그렇게 군홧발에 짓밟혀 떠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죽여도 되는 사람, 죽어도 마땅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영화 말미, 서울 택시 번호판을 숨겨준 이 거짓같은 실화의 주인공인 군인처럼 행동할 수 있는 기회는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무자비한 폭력 앞에 놓여진 운명은 모두가 같았다. 결국 정의를 눈감은 건 본인의 선택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택시 운전사> 스틸컷



찾아보니 실제로 그날 광주에서는 택시 운전사 분들께서 잠시 생업을 내려놓고 죽음의 저지선 앞에서 수많은 생명들을 살려내셨다. 영화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일이다.

"항쟁은 열흘이었지만 고통은 37년이다."

 아직도 전라도 사람들에겐 그 날의 저항이 주홍글씨가 되어 남겨져있다. 피로 눈물로 지켜낸 민주항쟁의 결말엔 여전히 빨갱이란 단어가 족쇄처럼 박혀있고, 학살을 선동했던 29만원의 사나이는 택시운전사는 왜곡되었다는 개소리를 지껄이며 잘 살고 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눈발이 휘날리던 겨울, 김사복 씨가 태운 손님의 목적지는 광화문이었다. 작년의 시위와 비슷한 장면이라 유독 여운이 남는 결말이었다. 사람이라면 응당 두려울 수 밖에 없는 폭력 앞에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의 정신을 알렸던 광주의 역사 앞에 난 결코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발 끝 감각이 사라질만큼의 추위였지만 20년도 전 광주시민이 치루었던 희생에 비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의 것이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결과임을 역사로 배웠기에 나 역시 광화문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분들께 부끄럽지 않기 위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끔찍한 그 날의 학살이 담긴 영상을 다른 지역에 뿌리며 알린 변호사가 그 날의 항쟁으로 투표권을 얻은 시민들의 힘으로 지금의 대통령이 되었다. 역사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진심으로 온 맘 다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2071.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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