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가 품은 마을, 아씨시

이탈리아에 간다면 꼭 놓치지 않기를

by 문연이

'제가 멀미를 심하게 해서 조금만 천천히 가주세요, 기사님.'


라고 용기내어 말하기 무섭게 휘청이던 택시 바퀴가 휘청인다. 저돌적인 드라이빙 실력을 뽐내는 기사님의 힐끔거리는 시선에 ‘이대로 납치되는건가’ 하던 생각이 문득 들 때 쯤, 아씨시가 떠올랐다.


피렌체와 로마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 아씨시는 이탈리아 여행 준비를 하며 가장 가고 싶던 곳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였을 뿐 아니라 사진에서 전해지는 고요함이 내 마음을 울렸기 때문에.




20140821-IMG_2383.jpg 아씨시의 첫 인상

피렌체에서 출발한 기차는 2시간을 달려 아씨시에서 정차했다. 생각보다 훨씬 시골스러운 정취에 플랫폼에 발을 디디자마자 홀렸다. 드디어 이곳에 왔다! 는 기쁨의 미소를 가득 품은 채 엄마의 취향이 한껏 묻어난 꽃무늬 배낭 캐리어를 등에 이고 역 앞에 있는 관광센터로 갔다. 이 평화가 5분도 안되서 깨질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관광센터는 아기자기했다. 그 곳의 직원처럼 보이는 남성과 그와 친구처럼 보이는 또 다른 남성에게 눈 인사를 건낸 뒤, 아씨시를 담은 아담한 나무 의자에 앉았다. 잽싸게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숙소 예약 사이트에 들어가 미리 예약해둔 호텔 이름을 찾았다.


응? 그런데 지도에 내가 예약해둔 호텔이 뜨질 않는다. 와이파이가 이상한가 싶어 인터넷 새창을 켜봤더니 한국에 왔나 싶을만큼 빠른 속도로 초록색 네이버 화면이 띄워졌다. '이럴 리 없어' 현실을 부정하며 다시 숙소 예약 사이트에 들어가봤더니 아뿔싸. 예약해둔 호텔의 위치는 무늬만 아씨시였지 실제로는 걸어가다간 10리도 못가 발병날 게 뻔한, 그만큼 머나먼 곳에 있었다. 온몸으로 붕괴된 멘탈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망했다 엿됐어 멍청아 빠가사리 아니냐? 아니 이럴 리 없어. 그럴 순 없어. 잘못 본 걸꺼야. 다시 보자' 놀람 > 분노 > 부인 > 인정, 이 분노의 4단계가 하이패스로 지나갔다


그 때 내 옆에선 아까 눈인사를 건냈던 두 남성이 내 멘탈이 붕괴되는 과정을 조심스레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나라 언어지만 욕임에 틀림없는 쌍소리에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그들은 내게 다가와 무슨 문제가 있느냐 물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그들에게 구구절절 사연을 설명했다


‘이 호텔 아니? 내가 분명 여기 예약했는데 전화도 안받고 위치 확인해보니까 너무 멀어 여기까지 갈 수 있는 방법 알아? 얼마나 걸릴까?’


내가 살면서 나도 놀랄만큼 영어를 잘했던 순간이 있는데 첫 번째는 경찰에게 붙잡힐 뻔한 베니스에서, 두번째는 바로 이곳 아씨시에서였다. 영어를 배우려면 이태리 유학을 떠나야하는걸까. 무튼 넋두리를 빙자한 도움 요청에 그 곳의 직원처럼 보이는 남성은 이런 호텔은 처음 들어본다며 다른 숙소를 구해보라고 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던 그 때, 그 옆에 있던 남성이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나 집 2갠데 하나 내어줄까?'




20140821-IMG_2384.jpg 아씨시의 시가지처럼 보이던 광장


아 너무 클리셰같은 설정이다. 테이큰, 본 시리즈, 미션임파서블 같은 액션 첩보물을 일일드라마처럼 봐온 내게 이건 너무 명확한 범죄의 시그널이었다. 하지만 극한의 상황이 무서운 이유가 무엇인가. 이 불보듯 뻔한 시그널이 하늘에서 내려주신 동아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결정은 훗날 내가 보이스피싱에 낚이는 사람들의 심정까지 헤아릴 수 있는 공감 능력을 선물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15분 전 처음 만난 사내와 함께 그 사내의 소굴로, 그것도 제 발로 들어갔다.


집은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원래는 부인이 살던 집이었는데 결혼을 한 후로 집을 합쳐 남은 집이라며 게스트룸으로 쓴다고 했다. 와이프 이야기를 듣고는 약간 안심할 뻔 하다 '이마저도 트릭일 수 있다'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미 제발로 기어들어온 마당에 말이다.) 그는 마트와 관광지 위치, 문을 잠그고 여는 방법을 알려주고는 쿨하게 떠났다. 저렇게 떠나고선 자신의 조직원을 데려와 날 납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상냥하게 땡큐, 땡큐 소머치를 연발하고는 조급한 움직임으로 문을 잠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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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의 느낌이 물씬 풍기던 길거리


납치의 전조든, 하늘이 내려준 동아줄이든, 마침내 아씨시에서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낯선 곳에서 느끼는 낯선 아늑함에 일단 한숨은 돌렸지만 여전히 긴장을 풀면 안된다는 생존본능이 뉴런 깊숙히 살아있었다. 집안을 대충 둘러보니 게스트용 집답게 있을 것들이 다 갖춰있었다. 호텔만큼 번쩍거리는 느낌은 없었지만 오랫동안 이 곳에 친숙히 머물렀을 사람의 숨결이 남아있어 자꾸만 마음같지 않게 마음이 편해졌다.


이렇게 널부러져 있다간 급습당할지 모르니 일단 나가자는 생각에 밖으로 나갔다. '로카 마조레 요새'로 가기 위해 구글 지도를 보며 정류장을 찾아 갔다. 버스를 타야한다는데 어디서 어떻게 티켓을 타야하는지 몰라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던 참이었다. 백발의 할아버지가 길잃은 아이 표정을 짓고 당황해하는 나를 보시곤 인자한 웃음과 함께 표를 팔고 계시던 아주머니께 데려다주셨다. 영어도 안통하고, 와이파이가 없어 번역기를 쓸 수도 없었던 터라 표를 어떻게 살 지 고민하며 다가갔는데 여기서 너같은 관광객이 갈곳은 거기 밖에 없을거다 하는 자신만만한 움직임으로 으레 있어온 일인듯 능숙하게, 표정만은 오래 만난 동네 이웃을 보듯 친숙하게 버스표를 건네주셨다.


- 그라찌에

- (환한 미소)


이 곳에선 특별히 감사할 일도 없는데 자꾸만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그라찌에 라는 인사 다음 찾아오는 얼굴빛이 햇살을 닮았기 때문일까? 이 나라에선 오 솔레미오 라는 노래가 만들어질 수 밖에 없었겠구나 하고 절로 이해가 가던 그 얼굴빛이 참 좋았다.




20140821-IMG_2389.jpg 로카 마조레 요새


그렇게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지난 뒤 내려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니 요새의 풍채가 드러났다. 아씨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요새답게 마을의 전경이 한 눈에 펼쳐졌다. 그 곳에서 내려다본 아씨시는 천사의 축복을 받은 마을이었다. 평화가 내려앉은 동네. 머리칼을 쓰다듬고 가는 바람에서 따뜻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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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카 마조레 요새에서 내려다 본 아씨시


천사의 손길같던 바람을 느끼며 다시 요새 아래로 내려와 이번엔 성 프란치스코 성당으로 향했다. 천주교의 순례지로도 유명한 곳답게 각 국에서 온 여행객으로 적당히 붐비고 있었다. 먼 발치에서 바라본 성당은 소박하게 우아했다. 유난스럽지 않게 그곳을 감도는 성스러움에 그동안 쌓여온 여독마저 씻기는 기분이었다.




20140822-IMG_2415.jpg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그 날은 집을 떠나온 지 3주쯤 되던 날이었다. 비엔나부터 프라하, 부다페스트, 베니스, 피렌체까지 유명한 도시들을 거쳐오며 그 화려함에 취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지치기도 했다. 아씨시는 여행의 중반에 다다라 더이상의 화려함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무렵 쉼터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큰 볼거리도, 이름 날리는 맛집도 없었지만 이 도시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조용한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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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안온한 관광을 마치고 마트에 가 요깃거리를 샀다. 마트에서 오는 길엔 바이크 헬멧을 쓴, 장동건의 이미지가 물씬 풍기던 아씨시의 한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안타까운 건 그는 영어를 몰랐고 나는 이태리어를 몰랐다는 것. 삐어삐어를 연발하는 걸 보니 맥주나 한 잔 하자 이런 뜻인듯 했다. 얼굴만 봐도 취하는 기분이었지만 더이상의 경계심을 사서 얻고 싶진 않았기에 나는 쏘리 아이헤버보이프랜드 히즈웨이링폴미앳홈 하며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 물론 그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시야가 탁 트이는 외모와 달리 갑갑한 언어의 장벽이 그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번개를 맞고는 3개국어를 하게 되었다는 한 외국인의 뉴스가 떠올라 번개라도 맞고 싶은 심정이었다. 삐어는 못해도 대화는 할 수 있지 않나. 그렇게 말같지 않은 말이 오가고 있던 찰나, 그가 삼성 갤럭시폰을 꺼내 번역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얌마 진작 꺼내지. 그렇게 몇 번의 대화다운 대화가 오갔다가 한 손에 바이크 헬맷을 간지나게 들고, 찢어진 흑청을 찢어지게 잘 소화한 그와의 만남이 훈훈하게 끝났다. ‘나는 열여섯살이야’가 번역된 갤럭시폰을 보여주던 그의 미소가 여전히 옅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20140822-IMG_2437.jpg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잘못 끼워진 줄만 알았던 첫 단추가 사실은 제자리를 찾아간 것이었음을 깨달았을 땐 몇 시간 전만 해도 마피아의 함정이 아닐까 했던 집이 그새 아늑하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샤워를 하고 하늘이 탁 트여 보이는 안방의 침대에 앉아 나름의 식탁을 차려놓고 아씨시의 첫날밤이자 마지막밤을 즐겼다. 물론 만일을 위해 안방문 앞을 서랍장으로 막아두긴 했지만, 그 정도의 긴장감이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오늘 하루 만난 아씨시의 사람들을 보니, 그들의 조건 없던 친절과 대가 없던 웃음을 다시 떠올려보니 자연스레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렸다. 당연하듯 찾아온 밤이 아쉬웠다.




20140822-IMG_2439.jpg 마피아의 소굴이 아닐까 했지만 가장 아늑한 숙소가 되어준 그 곳에서 바라본 별하늘


아씨시를 다시 떠올릴 때면 늘 아찔하다. 만약 그때 다른 시간의 기차를 탔다면, 그래서 내게 집을 내어준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가 만약 정말 마피아였다면 내 여행은 어땠을까? 결국 여행은 그러한 '만약'의 연속이고, 갖가지의 우연이 버무려진 요리다. 완성되기 전까진 어떤 맛을 낼지 모르니 너무 두려워해서도 너무 안심해서도 안되는 여정. 정말이지 아씨시의 천사가 품어준 듯한 행운의 하루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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