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에게도 자격증이란 것이 있다면

엄마는 빵점일 거라고 말했다.

by 문연이

"다 니가 욕심이 많아가 그런기다."

"엄마가 이래 키웠다이가."


엄마와 오랜만에 긴 통화를 나눴다. 다소 피곤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아서인지 엄마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별일은 없는데 사는 게 별스럽다는 듯 대답했다. 얼마 전에는 생리가 7주나 밀려서 속을 썩이더니 요새는 위가 안 좋아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다고. 병원에 갔더니 산부인과나 내과나 특별한 병은 없고 그냥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러니 쉬라고만 한다며 어미 새를 향해 지저귀는 아기 새처럼 일러바쳤다.


엄마는 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느냐고 묻더니 곧이어 내가 욕심이 많아서 그렇다며 자문자답 식으로 나를 놀려댔다. 그 말에 딱히 부정은 하지 못하면서 반박한답시고 대꾸한 말이 엄마가 이렇게 키워서 그래! 였다.


사실이었다. 울릉도로 이사 오기 전, 그러니까 내가 10살쯤 먹었을 무렵부터 엄마는 조기교육의 선도자였다. 바둑 학원, 피아노 학원, 미술 학원 등등 어린 시절 노오란 학원 차에 타 있던 시간을 합하면 전국 일주도 가뿐했으리라. 학원 이야기를 꺼내자 엄마는 내가 4살 무렵 한글을 뗀 걸 보고 당신 딸이 천재인 줄 알았단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이것저것 시켜봤지만 확인한 건 내 천재성이 아닌 잔꾀였다며, 학원에 갈 때마다 배가 아프다고 30분 동안 화장실에 틀어박혀 있고 억지로 눈을 비벼 눈병에 난 것 같다는 핑계로 집에 돌아오는 걸 보고 '천재는 개뿔'하고 느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교육열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갓 들어갔을 무렵엔 한석봉 엄마에 빙의해 저녁 재료를 손질하는 엄마 앞에서 국어책을 들고 한치의 버벅거림 없이 발표하는 연습을 시켰고, 구연동화나 웅변대회가 있는 날이면 대국민 연설을 앞둔 대통령처럼 밤늦게까지 스무 번이고 서른 번이고 원고를 외워야 했다. 감기가 들려 병원에라도 가야 하는 날엔 엄마 사전에 결석은 없다며 아픈 몸을 이끌고 굳이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감기 인증을 하고 조퇴를 받아와야만 했다.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던 증거 조각들을 티슈 뽑듯 꺼내어 엄마에게 들려줬더니 엄마도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 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열심히 살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며 '이러니 내가 욕심이 안 생길 수가 있나!' 했더니 엄마도 그때는 왜 그렇게 나를 닦달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스물여섯 살에 결혼해 스물일곱, 그러니까 올해의 나보다 한 살 어린 나이에 나를 낳았다. 안 그래도 어린 데다가 막내딸이라 형제자매 중 가장 어리광을 부리며 자란 덕분에 엄마는 엄마 노릇을 어떻게 하는 건지 몰랐었다고. 아마 부모 자격증이라는 게 있었다면 당신은 빵점이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런 게 어딨느냐고, 요즘은 자식 목숨 끊는 부모도 얼마나 많은데 하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지만 큰 소용이 있는 말은 아니었다. 엄마는 후회 가득한 목소리로 그때 당신은 너무 철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럼 엄마는 몇 살 때 철든 것 같은데?"


"엄마? 엄마는 마흔 넘어서 철든 것 같은데? (전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니랑 신이랑 사춘기 왔을 때, 아이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사춘기가 왔구나 하고 내삐리놨으면 알아서 잘했을 낀데 엄마도 자식들 사춘기가 처음이니까 야들이 와이라나 싶기도 하고 자꾸 삐딱선 타니까 열이 받아가 혼내고.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와 그랬을꼬 싶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다. 부모 두 사람이 나눠 감당해야 할 몫을 혼자서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다. 심지어 신이랑 나의 사춘기는 나이 차가 무색하게 비슷한 시기에 찾아왔고 그래서 모두가 혼란스러웠다. 그때만 생각하면 엄마와 나, 신이 우리 세 명이 서로에게 지워 준 죄책감이 떠올라 괜히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엄마는 다시 그 시기가 떠올랐는지 계속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고해성사하듯 말했다. 우리가 클 동안 먹고사는 게 바빠 맛있는 간식 한번 제대로 만들어 준 적 없고, 가족 여행 한 번 가본 적 없이 자라는 동안 상처만 춘 것 같아 미안하다며.


그 말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정말 아무렇지 않게 '아니다. 괜찮다.' 하고 위로해줄 수 없었다. 속으로 수없이 많이 엄마 아빠를 원망했고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했으므로. 충만한 사랑 한가운데 작지만 뜨거운 애증을 품고 있었다. 엄마가 내심 원하는 길과 다른 길로 갈 때면 미안해하는 대신 그 애증으로 어긋남을 합리화하곤 했다. 이건 당신이 내게 준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엄마의 눈물 앞에서 엄마도 나도 죄가 없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울먹거리는 엄마의 음성에 가슴이 미어졌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엄마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간지럽지 않게 표현해야 했다.


"엄마, 얼마 전에 신이랑 술 먹으면서 결혼이랑 자식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결혼은 해도 애는 절대 안 낳고 싶다고 했거든. 나는 엄마한테 받은 만큼 내 자식한테 해줄 자신이 없어서. 근데 신이는 결혼은 안 해도, 아니 사실 못하는 거에 더 가깝긴 한데 무튼, 애는 키워보고 싶대. 입양해서라도. 왜 그러게?"


"와 그란다 카노."


"신이는 엄마한테 받은 게 많아서 자기도 자기 애한테 그런 존재가 돼보고 싶대. 자식이 힘들어하면 자기가 기댈 수 있는 존재도 되고, 잘 크는 걸 보면서 뿌듯함도 느껴보고 싶대. 엄마는 우리가 알아서 잘 컸다고 하는데 엄마, 그게 되나 안되지. 우리 제일 가까이에 있는 어른인 엄마가 잘하니까 우리가 보고 배운 거지. 그니까 너무 안 미안해해도 된다."


괜히 쑥스러워서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정 표현이었다. 그리고 한 점 부끄럼 없는 진심이었다. 나 자신을 썩 훌륭한 어른이라 자부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 치열한 사회에서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자립해 입에 풀칠하고, 가끔은 누군가를 도울 수도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건 엄마의 희생과 사랑이 늘 나를 지켜줬기 때문이니까.


사랑은 가끔 칼 같아서 상대방에게 의도치 않은 상처를 준다. 그걸 깨닫지 못한 부모는 사랑 뒤에 칼을 숨겨두거나 아예 자식을 칼로 삼아 자기 욕심의 뿌리를 다듬으려 한다. 나는 다행히 모진 시간으로 칼 같은 사랑을 잘 다듬어낸 엄마를 엄마로 만났다. 엄마는 부모 자격증이 있다면 빵점이었을 거라고 말하지만 나 역시도 자식 자격증이 있다면 자격 박탈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모가, 그렇지 않은 자식이 있을까?


나는 엄마 덕분에 서로를 아무리 넘치듯 사랑해주어도 부족하다는 겸손, 상대가 의도치 않게 휘두른 사랑 속의 칼에 기꺼이 베일 자리를 내어주면서도 눈 감아줄 줄 아는 아량, 서로를 가엽게 여기어 미안하다고 말할 줄 아는 용기만이 진정한 사랑을 완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딸은 엄마로 인해, 엄마는 딸로 인해 철이 든 시간. 이 시간이 앞으로도 오래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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