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에 대하여
우정은 서로 폐를 끼치거나 입지 않고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남에게 부탁하는 일을 주사 맞는 것만큼이나 싫어하는 나였다. 내 수고를 덜자고 남의 수고를 빌리는 것이 영 불편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좀처럼 사람들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벽을 허물기가 어려웠다. 티백을 담갔다 뺐다 반복하듯 서로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해야 관계의 깊이도 더 진하게 우러나는 법일 텐데, 받는 건 부담스럽고 주는 것도 부담스러워할까 봐 애매모호한 사이에서 진척을 내기가 어려웠다.
스무 살 때 처음 만난 친구들 (a.k.a. 독수리들) 도 처음엔 그랬다. 매일 같은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면 함께 술을 마시고, 새벽 어스름할 때 팔짱을 끼고 기숙사로 돌아갔던 우리였다. 겉으로 봤을 땐 베프가 따로 없었지만 친구들도 나도 알고 있었다. 우리 사이엔 여전히 투명한 벽이 존재했다. 그 벽이 허물어진 건 내 허물을 보이고 나서 부터였다. 내 이야길 하기보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웃어주는 편에 가까웠던 내가 어느새 속엣말을 터놓기 시작했다.
이 아이들의 천직은 방청객이 아닐까 싶을 만큼 별 거 아닌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고 제 일처럼 반응해주는 모습에 태생적인 경계심이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진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울기도 했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 취하기도 했다. 다음 날엔 서로에게 끼친 폐를 안주 삼아 다시 잔을 부딪혔다. 벗겨진 내 가면의 무게만큼 친구들과의 거리는 가까워졌다. 우리 다섯은 그렇게 서로에게 폐를 끼치거나 입으며, 서로를 터놓고 보듬으며, 관계의 교집합을 만들어갔다.
오랫동안 곁에 있어 당연하다 생각했던 울릉도 친구들 (a.k.a. 9290)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처음 엮어준 건 비슷한 성격과 취향, 잘 맞는 유머 코드였지만 우리를 10년이 넘게 묶어준 건 서로에게 털어둔 마음의 짐 때문일 것이다. ‘좋은 일도 아닌데 굳이 왜 말하나’ 하는 생각은 우리 사이에 없었다. 기쁜 일은 당연히 함께 나눴고, 슬픈 일은 숨기거나 외면하려 하지 않았다.
가히 인생 최악의 순간이라 부를 만했을 때, 쉽게 잠들지 못해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던 그 시간 친구들은 내 양 옆에 나란히 누워 말없이 손을 꽉 잡아주었다. 담담히 털어놓은 비극에는 함께 울었고,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는 생색 없이 나섰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이들에게 끼친 수많은 폐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럼에도 얼굴이 붉어지진 않는다. 그쯤은 용인해주리란 믿음이 있는 사이가 되었으니.
마음의 면역력이 0에 수렴할 정도로 나약했던 시간이 있었다. 툭하고 건들기만 해도 그쪽으로 힘없이 쓰러져버릴 것 같았던 때, 친구들은 나를 담담히 받아주었다. 내 벽은 그렇게 허물어졌고, 누군가 내게 쓰려졌을 때 그 무게를 감당해낼 수 있는 우정이란 힘을 얻었다. 하루키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매일 양치하듯 얼굴을 보고, 내일이 없이 이야기를 나눴던 우리였는데 어느새 교복을 벗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며 한 달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든 어른이 되었다. 물리적 거리는 이토록 멀어졌지만 함께 주고받은 시간과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여전해 심리적 거리는 늘 지척이다. 여전히 타인에게 의지하고 부탁하기 어려워하는 나지만 이 친구들에게만큼은 힘든 일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고, 애인에게도 잘 하지 못하는 보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을 막힘 없이 말한다. 방 한편에 상장처럼 자랑스레 걸어놓은 함께 찍은 사진을 볼 때면 가끔 코 끝이 찡해진다.
며칠 전엔 민지에게 코타키나발루에서 함께 찍은 사진과 함께 이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카톡이 왔다. 사진만 봐도 행복하다며 맞장구를 쳤더니
니랑 다섯 마디도 얘기 안 했는데 기분 좋아지는 건 마법인가
하고 답이 날아왔다. 마법처럼 우리 첫 만남이 떠올랐다. 막 스무 살이 된 우리가 수줍게 인사 나눴던 그때. 그랬던 우리가 서로 허물을 벗고, 적당히 폐를 끼치고, 적당히 보답하며 켜켜이 쌓아 올린 시간들. 참 잘했다 다행이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