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연기를 뭐 저렇게 하지?"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 <택시 운전사>를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가슴 아픈 역사에 주먹을 꽉 쥐고 엉엉 울어 눈이 팅팅 부은 채로 나와 정신을 차렸을 때쯤 혼잣말로 중얼거렸던 첫마디였다. 송강호가 출연한 영화들이 스쳐갔다. <사도>, <밀정>, <변호인>, <관상>, <설국열차>... 분명 같은 얼굴에 억양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은데. '귀 씻을 물을 가져오라'며 아들을 타박하고 뒤주에 가둬 죽인 모진 왕을 소름 끼치도록 연기한 걸 본 게 생생한데, 억울한 누명을 쓴 학생을 변호하기 위해 서슬 퍼런 검사와 판사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롱테이크 씬을 보면서 감탄한 게 아직 기억나는데 어떻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 물정 모르는 택시 운전사 역할까지 기가 막히게 소화한 것일까. 놀라웠다. 그리고 부러웠다. 어떤 역할이든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자기만의 색깔로 표현해내는 그가.
그에 비해 나는 지극히 평범했다. 내가 맡은 일은 누구라도 대신할 수 있었고, 내가 찍은 사진은 누구라도 찍을 수 있을 것 같았으며, 내가 쓴 글은 초딩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들이 우와~ 할 만한 특별한 취향이랄 것도 하나 없었다. 남들 다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듣고, 남들 다 가는 맛집을 가고, 남들 다 아는 브랜드의 옷을 입으며, 남들 다 사진 찍는 곳에서 인증샷을 남긴다.
남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싶어 어울리지도 않는 분위기를 부려본 적도 있다. 사운드클라우드에서 '나만 아는 가수'를 찾겠답시고 이 노래 저 노래를 껐다 켜기도 하고, 잡지를 뒤져 생소한 브랜드를 찾아 아는 체해보기도 하고, 하버드대 명예 교수들이 읽는다는 철학 책을 12페이지 정도 읽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내 색깔을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시골에서 자라서 그런가.' 하는 돼먹지 못한 피해 의식이 발동할 때도 있었다.
어릴 때는 <투모로우> 같은 영화를 보면서 '나는 특별하니까 저런 재해가 닥쳐도 살아남을 거야!' 하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씩씩한 아이였는데, 어느새 재해에서 살아남기는커녕 회사에 있는 내 책상 하나 지키기도 버거운 어른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요즘 다시 빛을 보고 있는 개그우먼 장도연 역시 비슷한 고민을 했다는 글을 보았다. 그에게 한 작가가 "다 좋은데 도연 씨는 색깔이 없는 것 같아."라는 말을 건네어 시작된 고민이었다. 그 말에 '내 색깔도 없이 10년간 활동을 한 건가.' 싶어 많이 괴로워했다고. 그때 동료인 개그맨 김준현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럼 넌 슈멀노멀이네." 노멀 중에도 최고(super)로 노멀한 것. 이 이야기를 듣고 장도연은 색깔이 없는 것 자체가 색깔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색깔이 없으니 다른 색깔, 다른 방송인, 다른 프로그램에도 잘 어울릴 수 있겠다고 사고방식을 바꾼 것이다. 제 모습을 바꾸려 하지 않고 오롯이 받아들이자 더 행복하게 일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는 말했다.
내 기준에 독보적으로 재미있는 사람도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 싶어서 한 번, 그 고민 끝에 내린 '색깔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라는 결론에 두 번 마음이 놓였다. 그러다 며칠 전, 회사에 얼마 전 퇴사했던 동료 한 분이 놀러 왔다.
"프로님, 내가 브런치 돌아다니다가 글을 하나 봤는데 프로님이 쓴 거 같은 거야. 그런데 다 읽고 보니까 진짜 프로님이 쓴 글이었어!"
*우리 회사는 동료를 프로라고 부른다.
내 글에 내가 묻어있다니! 그것이 좋은 색이든 나쁜 색이든 상관없었다. 송강호 배우가 어떤 작품에서도 그의 색을 뽐내듯 내 글에도 내 색이 묻어있다는 사실, 그 사실을 알아봐 주는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벅찼다.
"프로님 부러워. 나는 내가 뭘 잘하는지도 모르겠고, 남들 하는 거 따라 하고만 있거든. 나는 내 색깔이 없어."
그때 알았다. 누구보다 명랑하고 똑 부러지는 그가, 항상 웃고 있어서 한여름의 청명한 숲 같은 그가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보는 데 있어서 색맹이라는 사실을. 자기 자신을 무채색이라고 말하지만 한 발 떨어져서 보면 여느 것보다 찬란한 색으로 빛나고 있는 우리가 어여쁘게 어우러져서 이 컬러풀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한 사람의 결이나 질감은 잘 관리된 콤플렉스에서 나와요. 패인 데에는 뭐가 채워지잖아요. 내 어디가 파여 있다는 걸 알면 또 다른 에너지로 채워져요."
_작사가 김이나
<떨림과 울림>이란 책에서 물리학자 김상욱은 '사람의 눈은 가시광선밖에 볼 수 없지만 우리 주위는 우리가 볼 수 있는 빛으로 가득하다.'라고 말한다. 이제는 안다. 내 콤플렉스는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내 주변의 다른 빛으로 채워질 수 있다는 걸. 송강호 같은 연기력은 없지만 자주 글을 쓰고, 나름 귀여운 그림을 그리고, 남들 가는 맛집을 따라가 즐거워하는 내게도 선명한 빛이 가득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