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을 쓰는 동안 가깝고 먼 곳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났어요. 기쁜 소식만 가득했다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잘 알고 지내던 사람 또는 친분은 없지만 알고 있던 사람들이 다치고, 사라지는 걸 지켜보면서 차마 '내가 알 바야 쓰레빠야'라고 외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분노로 가득 찬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왜 자꾸 남을 물어뜯고 나를 할퀴는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이 물음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우리는 나에게도 남에게도 너무 많은 관심을 두고 사는 게 아닐까 싶어요. 우연히 본 김병수 서울아산병원 정신의학과 임상 부교수님의 글에서 '행복한 사람은 자신에게 덜 집중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나에게 지나치게 집중하면 장점보다 단점이 더 눈에 들어오게 마련이고, 그것이 자신을 더 자책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이지요. 그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고, 나 자체를 인정하는 노력, 사랑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책 속 <찬란하게 빛나는>이라는 글에서도 말했듯 콤플렉스라고 생각했던 걸 다른 시야에서 보면 나만이 발할 수 있는 빛이 되기도 합니다. 구태여 빛일 필요도 없어요. 약점이 약점이면 어떤가요. 누구나 약점 하나쯤은 품고 살잖아요.
내가 완벽하지 않은 만큼 남도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우리는 완전히 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이는 상호 간의 존중을 이끌어내니까요. 존중은 '나'와 '남' 사이에서 'ㅁ'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타인과 같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것이 절대 이상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존중 없이 타인에게 지나치게 마음을 쏟으면 두 존재 사이의 균형이 무너집니다. 나와 남을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드는 도르마무의 세계에 갇혀버리게 돼요.
마음은 내 것인데 이게 지나치게 타인에게 쏠리게 되면 내게는 그에게 쏟은 마음의 찌꺼기만 남습니다. 그래서 쉽게 열등감을 느끼고, 쉽게 판단하고, 쉽게 비난해서, 끝내 쉽게 해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알 바야 쓰레빠야'의 주어는 때로는 '네'가 되고, 때로는 '내'가 됩니다. 내 주관을 굳건히 해야 할 때는 '네가 알 바야 쓰레빠야!'를 당당하게 외치며 쭈그러들지 않아야 합니다. 반면 내가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침범하는 것 역시 늘 경계하며 '그래, 내가 알 바야 쓰레빠야'하고 무관심하게 스쳐갈 필요도 있습니다.
화가 많은 세상입니다. 나에게 화를 내다가 그 분노를 감당할 수 없어 남에게까지 함부로 화를 내서 결국 모두가 화를 입는 세상입니다. 사랑과 존중, 배려는 입에 발린 말이 되어버렸고, 조롱과 희롱, 비난이 더 쿨한 행위가 되어버린 세상입니다.
저는 이럴 때일수록 입에 발린 사랑과 존중, 배려를 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말하지 못하는 사랑을 내가 두 번 말하고, 누군가 외면하고 있는 존중을 먼저 보여주고, 누군가 잊어버린 배려를 기억하는 건 분명 이 삭막한 세상에서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간지러운 말과 행동들이 누군가의 마음을 해하기가 너무나 쉬운, 누구나 도마 위의 횟감이 되어 살점이 내쳐지기 쉬운 이런 때일수록 메말라버린 우리 사이에 다정이라는 다리를 놓아주지 않을까요. 미우나 고우나 우리는 살을 부딪히며 함께 살아가야 하니까요.
이 책 속의 글을 쓰는 동안 저는 슬프기도 했지만 사랑했고, 감사했고, 즐거워했고, 평화로웠습니다. 그러니 부디 이 책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이 책에 담긴 사랑과 고마움, 즐거움과 평온함을 느끼시길 바랍니다. 제 이야기가 다시 당신의 이야기로 쓰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다르게 살고 있지만 결코 다르지 않음을 이해하고, 마침내 서로 존중할 수 있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