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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지 Mar 15. 2022

아무것도 되지 못 한 사람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했고, 잘못 지은 건물처럼 서서히 무너지고 있어."


침대에 누워 보나 마나 한 유튜브 영상들을 보며 시간을 때우던 오후였다. 평소 애정을 갖고 지켜보던 배우가 드라마 홍보를 위해 촬영한 영상이 보이자 나는 망설임 없이 화면을 눌렀다. 대체 불가한 그녀의 연기력에 반하지 않은 적이 없었기에 화면 속 그녀를 열렬히 궁금해하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공허함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저 대사를 읊었을 때, 나는 넉다운이 되고 말았다. 뭐랄까,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데 스크린에 갑자기 내 모습이 뜬 기분이랄까. 무방비 상태로 있던 나는 폐허 속에 있는 나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 역시 극 중 그녀처럼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했고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내 나이 서른아홉. 내게도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극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포기하지도 더 노력하지도 못했기에 서른아홉이란 나이만 덩그러니 남긴 채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동년배들은 대부분 이제 한 분야의 어엿한 전문가가 되어 있거나 성실한 직장인으로서 연차에 걸맞은 직책을 맡고 있었다. 육아를 하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차곡차곡 쌓아온 시간들이 아이들의 성장으로 성실히 환산되는 듯했다. 오직 나만 모두가 지나간 자리에 말뚝을 박은 채 그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방황하며 보낸 숱한 시간들은 경력이란 이름으로 쌓이지 못했다. 마흔을 앞두자 조바심과 절망감이 하루가 멀다 하고 광란의 트위스트를 춰댔다. 이렇게 살다가는 우울에 질식해버리고 말 것 같았다. 거짓말이어도 좋으니 누군가 내게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희망찬 미래가 준비되어 있다고 말해주길 바랐다. 


"제가 글을 써서 먹고살 수 있을까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내 미래를 묻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처량한 표정이 지어졌다. 마치 그녀가 내 미래를 결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대답을 기다리는 나의 어깨가 한없이 동그랗게 말렸다. 그녀는 내가 그러든지 말든지 종이 위에 가지런히 적힌 나의 사주를 수학 문제 풀 듯 거침없이 풀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풀리지 않는 문제를 마주한 사람처럼 골똘한 표정이 되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녀를 지켜보던 내 미간에도 덩달아 주름이 잡혔다. 내 인생이 나에게만 어려운 게 아니라니 묘하게 위로가 되는 동시에 웃음이 났고 또 불안했다. 그렇게 연민과 자조를 넘나 드느라 내 눈썹이 애처로운 팔자 모양이 되었을 무렵 그녀는 답을 찾았다는 듯 펜을 내려놓았다.


"안돼."


그녀의 단호한 결론에 나도 모르게 한숨인지 탄식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안 되는군요."


나는 겸허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랜 시간 꿈을 위해 달려왔으면서도 마음속 깊이 갖고 있던, 나는 해낼 수 없을 거라는 믿음. 모두가 쉬쉬하며 할 수 있을 거라 응원해주지만 사실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비밀. 나는 해낼 수 없을 거라는 믿음. 역시, 안 되는 거였군요. 해내지 못 한 내가 말했다.


"응, 안돼. 지금은."

"...... 지금은? 그럼 언젠간 된다는 말인가요?"

"되지. 아주 멋지게 해내지."

"언제요? 대체 언제요?"

"육십은 되어야지."

"뭐라고요? 육십이요? 육십이라고요?"


절망을 막을 수 없다면 절망 앞에서 유능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보다 태연하고 산뜻하게 절망하고 싶었다.

그녀의 말을 믿고 싶기도, 믿지 않고 싶기도 했던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겨울잠을 자려는 산짐승처럼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날 밤 꿈에 어디서 본 듯한 나이 든 여자를 만났다. 

그녀가 나를 보고 말없이 웃었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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