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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지 Mar 24. 2022

오해해서 오해합니다.

"우리 반에서 도난사고가 발생했다. 지금이라도 이실직고하면 용서해 줄 테니 셋 셀 동안 자수하도록! 기회가 지나가면 용서는 없어!"


선생님의 불호령에 범인이 아닌 나조차 오금이 저렸다. 때는 초등학교 4학년. 매년 겨울이 되면 학교에서 크리스마스 씰을 강매하던 시절이었다. 우표를 수집하듯 씰을 모으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별생각 없이 숙제를 하는 마음으로 구입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나는 후자였다. 1인당 최소 한 장씩은 꼭 구매해야 한다는 말에 기부와 나눔에 동참한다는 의식도 없이 그저 연례행사 치르듯 씰을 받아올 뿐 특별할 것이라곤 없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 해는 달랐다. 내가 좋아했던 짝꿍 J가 씰 수집가였기 때문이다. J는 수줍음이 많은 아기곰처럼 생긴 남자아이였는데 씰을 손에 쥔 채 기쁨을 숨기지 않는 그 아이의 모습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웃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씰이 사라진 것이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간신히 울음을 참아내고 있는 J에게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침묵 속에서 셋을 세는 동안 아무도 자수하지 않았고, 선생님은 결국 모두에게 소지품을 꺼내라고 했다.


"자, 이제부터 짝꿍과 자리를 바꿔 서로의 소지품을 검사한다. 실시!"


이상하게도 그 순간, 심장 박동이 멈춘 것처럼 머릿속에서 직선이 그어지며 삐- 소리가 울렸다. 30분 전 상황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빠른 속도로 리플레이되었다. 3교시 수업이 끝난 후 선생님은 크리스마스 씰을 나눠주셨고 곧 쉬는 시간 종이 울렸다. 아이들의 소란 속에서도 J는 얼마간 자리를 지키고 앉아 씰을 보고 또 보며 기쁨을 만끽한 뒤 서랍 속에 소중히 넣어 두고는 교실을 빠져나갔다. 나 역시 서랍 속에 있던 아무 교과서 사이에 씰을 꽂아두고 일어섰다. 10분 뒤 돌아온 교실. 내 책상 밑에는 한 장의 씰이 떨어져 있었고 어쩐지 당연히 내 것이라 생각했던 나는 왜 떨어졌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며 다시 책을 꺼내 아무 페이지에 꽂아 넣었다. 그런데 맙소사. 그게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단 말인가. 어째서 당시에는 짐작조차 못 한 것일까. 


나의 심장이 전속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J의 손이 나의 책을 향해 가고 있었고, 나는 떨어져 있던 씰이 부디 나의 것이었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 아이의 손에서 휘리릭 넘겨지는 책장이 슬로비디오처럼 보였다. 이윽고 씰이 꽂혀 있던 페이지에서 책이 쩍 하고 입을 벌렸다. 그리고 다시 나머지 페이지를 휘리릭 넘기자 책은 또다시, 쩌억- 입을 벌렸다. 지난밤 만화책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한 채 괴물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주인공의 친구처럼 나는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현실에서 나는 주인공이었다. 오해라는 괴물과 싸워야 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뒤 용기를 내어 J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날 향한 혐오로 가득 찬 그의 눈과 망연자실한 나의 눈이 마주쳤다. 해명하려던 의지가 바스락 부서지며 먼지처럼 흩날렸다. J도 K도 L, M, N, O, P 누구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과 체념이 내 목구멍을 막았다. 나의 마음은 언어가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나는 그렇게 모두가 나를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30년 가까이 지난 이 일은 삶의 굽이굽이마다 잊을만하면 다시 떠올라 나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동시에 자라게 해왔다. 


나를 오해하는 이들에 대한 냉소로

때론 그들에 대한 이해로

불합리한 상황에 처한 나를 구하는 용기로

오해에 지친 누군가에게 다가서는 우정으로

숱한 오해도 지나가는 바람처럼 여기게 된 해방감으로.


근 며칠, 워드프로세서의 빈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 보니 스멀스멀 자괴감이 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기어올라왔다. 그리고 또다시 불현듯 이 일이 떠올랐다.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을 것 같아 해명을 포기했던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잘할 수 없을 것만 같아 서성이기만 하는 나로 자란 것이 보였다. 나를 가장 오해하고 있는 건 어쩌면 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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