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으로 남다

그림자의 주인 16

by 도란

Y는 이제 연구실 앞으로 불쑥 찾아오기도 했다. 주변의 시선 때문에 폭력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복도로 나올 때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며 다시 사귀자고 말을 걸었다. 그의 전화, 문자, 집 앞 선물 공세와 방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피가 바짝바짝 말랐다. 하지만 그에게 내 근황이 전해지거나, 나와 가까워 보이는 누군가가 괴롭힘을 당할까 두려워 그 누구에게도 상황을 알리지 못했다. 그가 바라던 대로 나는 다시 고립되어 갔다.


우리 집 공동 현관 앞에 서 있던 그를 모른 척 의연하게 스쳐 지나갔다. 이미 다 들켰을지라도 그곳이 내 집이라는 사실을 직접 확인시켜 주고 싶지 않았다. 그 후로도 매일 귀갓길에 거리를 헤매다 보니 눈을 감고도 동네 지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와 헤어진 지 벌써 3년이 지났지만 나는 자유롭기는커녕 생기를 잃고 있었다.


‘아, 이렇게는 더 못 살겠다.’




이제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 떨리는 손으로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학생이 무슨 일로…?”


2000년대 초중반, 스토킹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았던 탓일까? 내 설명을 듣는 경찰관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옅게 웃었다. 돌아온 답변은 더욱 실망스러웠다. 그가 집 안으로 침입이라도 했다면 ‘주거침입죄’로 처벌할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주변을 맴돌며 미행하고, 전화나 문자를 받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보내는 것은 현행법상 ‘범죄’가 아니라서 조처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학생, 그 사람이 학생을 때리거나
집을 부순 것도 아니니, 실제 피해는 없잖아요?
전화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아요?
음식까지 가져다준다면 친절한 사람인 것 같은데...
학생을 좋아해서 그런 것 같으니 잘 이야기해 봐요.”



집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아주리라 기대하며 찾아간 것인데, 마지막 보루마저 무너진 것 같았다. 젊은이의 귀여운 연애담을 전해 들었다는 듯, 낮게 웃는 파출소 사람들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눈앞이 깜깜했다. 끝없는 어둠이 지겨워서 집 안에서 불이라도 환하게 켜고 싶다는 생각에 암막 커튼을 사서 달았다.


신경을 딴 데로 돌리려고 일에 매달렸다. 집 앞에서 그와 마주칠까 봐 집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밤샘이 이어지자 다시 만나자는 그의 목소리는 졸음으로 멍한 귓가를 맴돌기만 했다. 그의 소리가 또렷이 들리지 않으니 지독한 불안감도 조금씩 흐려지는 것 같았다.


몸과 마음이 이제는 한계라고 말하고 있던 때, 뜻밖의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치료를 위해 거주지역을 옮기며, 비로소 그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오랜 감시와 미행의 굴레는 그렇게 끊어졌다. 그러나 직장과 건강, 미래의 계획까지 한순간에 무너졌다. 남은 청춘의 시간은 회복하는 데 전부 바쳐야 했다.


나는 다시 빈손이 되었다.




Y와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원치 않게 그의 소식을 들을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잠이 오지 않아 우리 집과 그가 산다는 지역의 거리를 재보기도 했다. 그가 나보다 더 좋은 여자와 결혼한다는 말을 덧붙이며 청첩장을 돌렸다는 소문도 들었다. 이어 그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에는 설명할 수 없는 화가 치밀기도 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네 딸도 같은 일을 겪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런 고통은 그 누구도 겪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어떤 아버지가 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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