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최초의 사건으로부터 20년이 훌쩍 흘렀다.
이토록 긴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시절을 차분히 돌아보고 글로 남길 수 있게 되었다. 그사이 내가 겪은 일들을 설명해 주는 단어들이 등장했다. 가스라이팅, 스토킹, 그루밍. 이 단어들은 모두 상대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고 자기 욕망대로 통제하고 조종하려는 폭력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나는 ‘끈기’와 ‘뚝심’이 연애의 미덕처럼 여겨지던 시절을 살았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라는 말들이 무용담처럼 떠돌던 때였다. 불편해도 그저 웃어넘기던 사이, 그 말이 누군가에게는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일방적인 구애와 괴롭힘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세상의 중심은 나이고 모든 게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라는 자기중심적인 사고 때문이 아닐까.
나의 시간 속에서는 아직도 그날이 계속된다.
스무 살, S가 내 눈앞에서 뛰어내렸을 때, 내 고치는 찢어졌고 나는 무언가를 영원히 잃었다. 지나고 보니 그것은 ‘건강하게 성장하는 힘’이었다. 그 뒤로 나는 찢어진 고치틈으로 한쪽이 어그러진 온전치 못한 모양으로 세상에 나왔다. 겁먹은 나에게는 다리로 몸을 지탱하는 것도, 날개를 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나를 존중할 마음이 없는 사람과 나를 조종하려는 덫을 분간할 눈도 가지지 못했다.
이리저리 흔들렸던 나는 단단한 정체성과 건강한 자아를 가진 어른이 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탈출할 수 없었던 상황 속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모습에 갇혀 있었다. 매일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삶을 버리려는 시도도 번번이 실패했다. 이것도 저것도 안된다면 시간이라도 돌리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삶을 부여잡고 있었다. 어려움을 다 털어놓을 수는 없었지만, 일상을 유지하려고 애썼고, 내밀어 준 도움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다. 심리치료에도 꾸준히 참여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이제는 괜찮아졌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여전히 사람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 경계심이 내 안에 남아있음을 느낀다. 누군가 집 주소를 묻는 순간, 나는 아직도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작은 용기와 실천들이 모인다면 언젠가 이 암막 커튼을 걷어내고, 누군가를 집으로 기쁘게 초대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나는 믿는다.
다행히 사회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스토킹이 살인 등 강력 범죄로 이어지는 사례가 늘면서, ‘치기 어린 사랑’이라며 스토킹을 용인하던 안일한 사회적 인식도 바뀌고 있다. 1999년 처음 발의된 이후 20년 넘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던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은 2021년 3월 마침내 국회를 통과해 2021년 10월 21일 시행되었다. 기쁜 일이었지만 동시에 아쉬움도 남았다. 법이 좀 더 빨리 제정되었더라면 그 시절의 나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더 나아가 2023년 7월 11일 자로 시행된 스토킹 방지법 개정안에서는 반의사불벌죄(피해자가 처벌을 바라지 아니한다는 의사 표시를 하면 처벌할 수 없는 범죄)를 폐지하고,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과 신변 안전조치 등 피해자 보호 장치를 강화했다.
이렇듯 속도는 더디지만, 법은 제정된 이후로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그러나 법률 개선만으로는 부족하다. 폭력 피해를 개인적인 일로 치부하는 시선, 제때 작동하지 않는 보호 장치, 쉽게 이어지는 가해자의 접근, 피해자의 회복과 사회복귀 지원 부족 등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스토킹은 사랑이 아니라 범죄다.
교제 폭력은 사적인 일이 아니다.
불건강하고 폭력적인 관계는 피해자가 잘못해서 생기는 일이 아니다. 불행한 사고처럼, 누구나 걸려들 수 있다. 그러니 누구라도 부디 자신을 탓하지 않기를, 피해를 입었더라도 자책하지 않는 굳건한 마음을 가지기를 바란다. 회복은 자기 자신과 자기 삶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켜 내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정신적, 신체적 한계 상황 속에서도 버텨온 나를 이제는, 칭찬해 주고 싶다. 어떤 사건은 너무 커서 인생이 되지만, 여기저기 찌그러져 있더라도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가 충분히 아름답다. 그렇기에 더욱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이렇게 전하고 싶다. 괜찮다고, 그리고 안아주고 싶다고.
이 글이 스토킹이라는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하고, 피해자들이 더는 혼자 고통받지 않도록 돕는 작은 발판이 되기를 바란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혼자 견디지 않기 위해서, 각자도생이라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물어야 한다.
나는 연약했고, 무지했다. 하지만 견뎌냈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나는 아름답다.
*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의 내용은 국가법령정보센터 웹사이트에서 참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