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이백 일흔 다섯 번째 주제
오후 4시 20분 정도
공중파에서는 유명하진 않지만
꽤 팬층이 두텁던 만화영화
주제가가 시작하고
나는 습관대로 책가방을 문앞에
던져두고,
뜻모를 광고들을 세어가며
4시 30분을 기다리는 때.
꼭 엄마는 만화가 막 시작할 때에
불러서는
과일이었나 만두같은 간식을
챙겨주었다.
잰걸음으로 받아와서
마법세계에 빠져드는 시간.
그리고 친구들이 기다리는
운동장에 다시 뛰어나갔다가
저녁 9시 10분에서 20분사이.
늦은 저녁식사를 하러
집에 오는 시간.
우리집은 꼭 국을 먼저
상에 올려두었는데 떠먹지는 못하고
수저를 정돈하며
엄마 아빠를 재촉하던 시간.
그리고 귀찮은 세수,양치가 끝나면
꼭 거실 바닥에 이불 덮고
과일을 꺼내두고
텔레비전을 보던 시간.
지금은 아무도
기다려주지않는
점심, 저녁 그리고
나 혼자만의 시간.
때를 놓친 식사를 하여도
늦게까지 놀다 돌아와도
누구도 혼내주지 않는
기다림 없는
나 혼자만의
시간.
-Ram
1.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그동안 적지 않은 순간들이 하나씩 기억났다.
같이 퇴근하고, 길을 걸으며 내가 어떤 아이템을 만들었고,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신나게 이야기했던 순간.
최대한 쉽고, 간결하게 들리게 (지루하지 않게) 말하면서 힐긋 그녀의 표정을 살폈던 순간.
스튜어트 다이아몬드의 내한강의를 같이 가자며 그녀가 모두를 설득했던 순간.
그 내한 강의에서 그녀가 맨 마지막으로 질문했던 순간.
매번 만날때마다 내가 이야기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그녀의 알 수 없는 표정을 보았던 순간.
혹여라도 내가 부족한 건 아닌가, 내가 그렇게 별로인 사람처럼 보이면 어쩌나, 조바심을 냈던 순간.
어쩌면 이기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던 순간.
그랬던 순간들이 하나씩 하나씩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만났다.
나의 하나의 실패라고 생각했던 그녀를.
2.
며칠 사이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점점 감기기운이 있는 것 같더니만, (이럴 땐 은근 많아서 씩씩하게 시간을 보내면 금방 지나갔다)
이번엔 하루하루 심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루는 오른쪽 코에서 콧물이 나고, 오른쪽 코만 코가 막히더니,
다음날은 왼쪽 코에서도 콧물이 나고, 왼쪽 코도 막히다 말다를 반복했다.
또 다음날은 아침에 화장을 하는데, 머리가 핑 돌아서 잠깐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바로 병원에 갔다.
친한 회사 동료는 내가 콧물이 나고, 아파서 병원에 간다는 것을 매우 낯설어하고, 신기해했다.
약을 처방받고, 점심 먹은 이후 바로 약을 먹었다. 약기운이 빨리 퍼지길 기다렸고, 빨리 감기바이러스를 잡아먹길 기다렸다.
하지만 약기운은 머리가 아픈 증세를 가져왔고, 덕분에 더 감기가 심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결국 일하는 도중에 집에 돌아왔고, 그날부터 주말내내 끙끙 앓았다.
다행히 열은 나지 않아서 몸에 기운은 있었지만, 컨디션이 너무 엉망이였다.
너무 괴롭고, 빨리 나아지고 싶은 생각에, 약을 꼬박꼬박 다 챙겨먹고 싶었다.
안먹던 누룽지를 끓였고, 코가 막혀 아무 맛이 나지 않는 꿀물을 타 먹었다.
내일은 괜찮겠지, 하고 다음날 일어났지만, 목까지 감기기운이 침투해서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말하기도 힘들어서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감기약을 먹기 위해 밥을 먹었고, 입맛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약을 먹었다.
내일은 더 회복되길.
-Hee
사실 누군가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내가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자리는 단지 나를 위해 머무는것이니까, 담담히 내가 고민해야할 것들을 정리할 뿐이었다.
게다가 너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조금 기다리는게 뭐 대수일까, 너를 만났을 때 느낄 반가움에 대한 기대만 가득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너의 미소가 기다려질 뿐이었다.
나의 행복, 나의 기쁨.
-Cheol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막 손님이 떠난 자리를 청소하고 있는 기성과 강아지 봄이가 있었다. 한참만에 보는 얼굴들이다. 언젠가 몇 번 그가 일하는 편의점에 한 번 들리겠다 말했었지만 집 바로 앞에도 있는 편의점을 두고 몇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이곳까지 올 일이 아마도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기성은 역시나 놀라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근처에 있는 예식장에 올 일이 없었더라면, 사촌이라곤 해도 많이 멀어진 기성의 편의점을 찾아오는 일이 아마 없었을 터였다.
기성은 새로 지어지고 있는 신도시의 한 가운데 홀로 있는 편의점의 사장이다. 식당 일을 그만두고 그간 모아왔던 돈으로 다른 곳보다 먼저 완공된 상가의 한 귀퉁이를 분양받아 편의점을 차렸다. 주변에는 여전히 아파트와 다른 상가들이 지어지고 있었고 편의점 바로 앞뒤로 큰 병원과 영화관 건물의 기초공사도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편의점이 하나뿐이라 인근의 인부 손님들을 독점하곤 있지만, 그 매출마저도 그리 넉넉지 않은 형편이라 간신히 버텨내는 중이라고. 건물이 다 지어질 2년을 무사히 버텨내는 것이 일단은 당장의 목표라고.
심심한데 또 안 심심하고 그래. 작지만 이 안에 tv도 있고, 봄이도 있고. 드문드문 손님들도 드나들고. 그래도 2년 정도만 더 기다면 돼. 영화관도 병원도 아파트도 다 지어지고 나면 사정이 지금보다는 더 괜찮아질 거야. 그래야지.
그러게 말이야. 주변에 다른 편의점이 안 생길 수는 없겠지 물론… 아마 영화관 건물에도 하나쯤은 생길 테고, 병원 안에도 들어설지 모르지만 어쩌겠어. 지금은 그러지 않길 바라면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잖아.
아무것도 없는 도시의 구색 갖춘 편의점이 주는 인상은 기묘했다. 오전 8시에 문을 열고 저녁 6시 반이면 닫는 편의점. 유제품류는 거의 대부분 유통기한이 지날 때까지 팔리지 않아 사장이 먹을 수 있을 만큼만 발주를 넣는 편의점. 그럼에도 단 하루조차 쉴 수 없는 편의점이라니. 그리 가깝지 않은 거리를 몇 번이나 멀지 않다고 말하며 자주 놀러 오라는 그에게 종종 오겠다는 말을 했다. 사실 단호하게 오지 않을 거라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지만 배불러서 아무것도 먹질 못하겠다는 내게 끝끝내 커피를 쥐여주는 기성에게 거짓말을 남기고 싶지는 않아졌다.
-Ho
2019년 4월 14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