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삼백 스물 네 번째 주제
둘이 살던 집에
혼자 남겨진 날,
네 흔적을 치우고 정리하면서
서랍을 털었다.
한 칸 가득히 들어있는
흰 양말 무더기가
아직도 네 흔적을 지우지말라고
시위하는 것 같았다.
스무 켤레 남짓한
하얀 양말을 보니 헛웃음이 났다.
너를 보는 것만 같아서 말이다.
고집불통,
곤조가 깊던 네 성격에
두 손 두 발 들며
살아온 시간이 무색하도록
양말이 너무 희어서 웃었다.
뒷꿈치가 헤지도록
신어대던 저 양말들은
덩그러니 남겨질 줄도 모르고
켜켜이 개켜져있었겠지.
그런 게 남겨진
집안 꼴이 우스운건 또 뭐람.
저 방은 온통 네 흔적이라
치울수록 답답해져서
내버려두기로 했다.
아직은.
-Ram
1.
나는 어쩌다 양말을 신었던 날이면
절대 뒤집어 벗지 않으려고 뒷꿈치를 앞으로 잡아 당긴 다음 앞코를 잡고 벗는게 습관아닌 습관인데
그냥 발목을 잡고 훌러덩 벗는 사람들이 많아 신기했다.
어릴 적부터 양말 뒤집어 벗어 놓으면 엄마가 꼭 양말을 바로 펴서 세탁기에 넣던 기억이 나서
양말을 똑바로 벗으면 그런 수고가 사라질거라는 마음에 어느 시점부턴가 양말을 제대로 벗게 되었다.
빨래할 때 뒤집어 놓은 양말이 나오면 그냥 널고 신경을 쓰지 않으면 되는데
또 마음이 그렇지 않은게, 괜히 제대로 원상복귀 해놓고 싶고, 마음이 불편해서 꼭 한 번은 더 만지게 되더라.
양말은 제대로 벗자. 보는 사람도 편하게.
2.
명절에 할머니가 고이 간직했던 양말을 나한테 줬다.
내가 발이 시렵다고 했기 때문에 어디선가 택도 뜯지 않은 새 양말을 주셨다.
그 양말이 말레이시아까지 와 있다.
할머니가 가끔 생각나는데, 할머니는 폴더폰이여서 카톡이 되지 않아 전화도 못한다.
오늘은 엄마한테 할머니 안부를 물어봐야겠다.
3.
양말을 신으려면 운동화를 신어야 한다.
그래서 예쁜 운동화를 신고 싶은데 아직 어떤 운동화가 어떻게 예쁜지 모르겠다.
거의 구두와 샌들을 신는 내게 운동화는 아직 어려운 영역.
막상 보면 이쁜데 신으면 이상한 운동화들도 많아서
내게 운동화는 여전히 어렵다.
4.
콩같은 양말들이 보면 볼수록 웃기다.
어쩌다 저런 콩같은 양말들만 신게 되었을까.
내 손바닥보다도 작은 듯한 정말 우스운 양말들.
그냥 콩같다 콩. 콩같은 양말.
-Hee
교복을 입고 데이트하는 날에는 양말 색이 정말 중요했다.
혹여나 신고싶은 양말색이 없으면 짜증을 내곤 했다.
하얀 양말 한 켤레 밖에 남지 않았을 땐 정말...
이렇게 촌스럽게 하고 데이트를 나가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제는 무뎌진걸까
어쩌다 흰양말이면 좀 어때
어쩌다 파란 양말이면 좀 어때
무뎌진 나날들
-Cheol
인싸의 패션이 100~120이라고 했을 때 나는 평소 70 정도를 갖춰 입는다. 70짜리 옷차림을 갖춘다고 표현하는 것이 우습지만 나름대로 체형과 취향, 제정 상황을 고려한 키치적인 옷차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갖춰 입는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70은 순전히 주관적인 생각이라 남들이 보기에는 그보다 더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게 옷장에는 등산복과 운동복만 한가득이고 내 취향이라는 것은 기능성 옷들을 사기 이전에 머물러 있으니 어쩌면 70보다 한참 덜 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내가 스스로 나의 옷차림을 70 정도라고 생각하는 데는 평소에 등산복을 입고 생활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포멀하지도, 유행을 굳이 바짝 좇지도 않지만 같은 부서 과장님처럼 일 년 365일 등산복 차림을 고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무난하고 튀지 않는 옷, 그럼에도 편안한 옷. 누구에게도 불편한 느낌이 들지 않게 만드는 옷이 내가 생각하는 70이다.
옷차림을 신경 써야 할 일이 없다 보니 안타까워할 일은 아니지만 최근에는 70이 점점 줄어들어 때로는 50언저리까지도 내려가는 경우가 많다. 원래도 무채색 계열 옷을 선호했는데 검정고양이와 같이 살게 된 이후로는 검은색 계절의 옷을 별 수없이 주로 입게 됐기 때문이다. 옷에 박혀 떼어내도 떼어내도 남아 있는 고양이 털 때문에 이제는 조금의 색 조합도 신경 쓸 여지가 없어졌다.
특히 양말에 있어서는 100% 검은색 양말만을 선택의 여지없이 신게 됐다. 매일 청소기를 돌려도 현관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는 몇 발자국 만에 흰 양말은 검정 털들로 순식간에 더러워지고 만다. 고양이와 같이 사는 반려자 입장에서 그건 더럽다기 보다 그냥 더러워 보이는 것일 뿐이지만 아무튼.
사실 서랍장 안에는 예전에 선물 받은 흰 양말 세트가 벌써 몇 년째 포장지도 뜯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해진 양말들을 버리려고 분류하며 그 흰 양말 세트도 같이 꺼냈다. 언젠가는 신을 날이 있겠지, 선물로 받았으니 보관은 해야겠지 하는 생각에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다른 누군가에게 줘버려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을 비워내고 꼭 필요한 것들만을 갖고 있는 일이야말로 확실히 삶을 간결하게 만든다.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팔고 버리고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일을 하며 마음이 한 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비워내는 일이 요즘 내 스트레스 해소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Ho
2020년 3월 22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