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 프로젝트 - 삼백 서른 다섯 번째 주제
애초에 이럴 계획이 아니었다.
적당한 선을 두고
거리를 두고,
조금 찬찬히 알아보고
결정할 심산이었다.
너와 이렇게
진지한 대화를 나눌 시간은
내 계획에 없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저 스치는 사람 중,
그저 그런 헤프닝같은 인연이어야 했다.
자리가 도드라질 수록
마음이 요동치고
현실을 돌아볼 때에
마음이 아려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네 계획은 어떨지
나는 모르지만
나는 조금씩 너를
끊어내는 연습을 해야만 한다.
너는 애초에 내 계획에 없던
그런 사람이니까.
-Ram
1.
완벽한 계획이랍시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계획 속에 날 제멋대로 넣어두고,
왜 자신의 계획대로 하지 않느냐며,
되려 뭐라고 하는 그런 멋없는 사람들.
나와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이야기 해 본 적은 있는지.
내게 제대로 물어본 적이나 있는지.
(사실 어차피 나한테 물어봤자 내가 거절할 것은 뻔했겠지만..)
이상하게,
누군가의 계획 속 나는 낯설다.
꼭,
이 책 다 읽고 방청소 하려고 하는데
엄마가 들어와서 방청소하라고 잔소리하면 하기 싫은 것처럼.
2.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스트레칭하기.
누군가 떠오른다면 바로 연락해보기.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꼭 초콜릿 사가기.
이번 주말에는 로컬 친구들과 저녁 먹기.
눈여겨봤던 카페 가기.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와 양치만 한 후 머리 질끈 묶고 러닝하기.
다음날엔 회사에 한라봉차 가져가기.
뭐 그냥 이런 소소한 것들만 잘 지켜도 충분하다.
크고 길게 보면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으니 말이다.
오늘 누가 내 곁을 떠날지도 모르고
누군가가 숨을 놓아버릴지도 모르고
하루아침에 님에서 남이될지도 모르고
혹은 내가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3.
내년 봄엔 뉴욕에 갈 수 있을까.
겹벚꽃이 가득한 뉴욕을 보고싶다.
4.
꼭 다 온 것처럼 보여도
새 길이 생겨.
재밌다고 이해할래.
-Hee
오늘 번 돈 뭉치를 책상위에 놓고
열 손가락 다 접어가며 돈 쓰일 곳을 따져본다.
지금까지 쓴 돈은 얼마나 되는지,
지난달보다 얼만큼 줄였는지,
불필요한 지출은 없었는지,
어쩔 수 없었던 지출은 두 눈 꼭감고 넘겨버리고
잔고가 부족한 통장은 없을지 셈 해본다.
목표가 생기고, 계획을 세우고,
아무리 계획짜는 일에 능숙하다 해도
사실 계획대로 돌아가는 일은 별로 없다.
옆동네 어느집 주가가 올랐다더라
이런 이야기는 뒤늦게 들어봐야 배만 아프다.
내 기준으로 그물을 펼쳐 던져보자.
내 목표에 다다를때까지 묵묵히 내 할 일을 해나갈 뿐이다.
-Cheol
아무리 무계획으로 제주에 왔다지만 짧게 머문 며칠을 모두 처음 만난 사람과 함께 보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애초에 제주는 준원을 만나 며칠을 같이 지내기 위해 온 것이었는데 정작 준원과는 밥 한 끼, 커피 한 잔을 먹고 헤어졌다. 그 나머지 시간을 모두 홀라인에서 우연히 만난 지영과 보냈다. 아무 계획도 없이 제주도를 이리저리 떠도는 사람 둘. 나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목적이라도 있었지만 지영은 그마저도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언제 돌아간다는 기약도 없이 천진한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처음 지영을 만난 날은 꽤 이상한 하루였다. 대뜸 나이를 묻고는 반말로 무례한 질문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불쾌한, 그러면서도 붙임성이 지나치게 좋아 어디서든 밥 굶는 일은 없을 아저씨를 만난 덕에 평소 같으면 낯가리느라 서로 말 한마디 나눠볼 일 없을 성격인 우리가 한 데 엮여 같이 캠핑을 하고 대낮부터 새벽까지 술을 진탕 마셨다. 그 밤에는 어쩐 일인지 지영에게 다음에 언제 저녁을 같이 먹지 않겠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 계획 없던 여행에서 아주 약간의 계획이 생겨난 순간이었다.
다음날 술이 깨고 정신을 차리니 곧 준원을 만나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종종 제주에 올 때마다 내가 머물던 곳에 준원이 잠시 찾아왔었고 그게 미안해 이번에는 온전히 준원에게 모든 걸 맞추기로 했었다. 내가 간과한 것은, 나는 일정이 없는 여행자였고 전과 달리 준원은 이제 제주에서 생활하는 바쁜 직장인이라는 점이었다. 준원의 스케줄 사이 틈새를 이용해 잠시 얼굴을 보고는 다시 혼자가 됐다. 아쉬웠지만 그보다 안도감이 더 먼저 찾아왔다. 거리낌 없이 지영을 만나 저녁을 같이 먹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별다른 계획은 없었지만 최소한의 여행 동선을 정해두긴 했었다. 서울 면적의 세 배나 되는 제주를 이리저리 이동하면 제한속도 50km의 갑갑한 도로 위에서만 시간을 보내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서귀포까지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짧은 여행 중 벌써 두 번째, 기쁜 마음으로 지영이 있던 서귀포로 이동했다. 같이 저녁을 먹고 관광지를 걸으며 내일은 어디를 같이 갈지, 무얼 먹을지 계획을 짰다. 새벽에 일어나 대기 줄을 서려고 도착한 연돈 앞에서 휴무인 걸 깨달았고 기대하며 찾은 투명 카약이 사라지고 날씨까지 갑작스레 흐려져 비가 오는 등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활활 타오를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무계획이 계획이 되고 다시 무계획이 되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여행이 끝나갈수록 이상하게도 없던 욕심이 점점 불어났다. 여행지에서나 느끼는 순간일 뿐인 잠시의 기분을 반복해서 느끼기 위해 지영과 서로 인천, 부산을 오갈 계획을 짜고 있다. 언제라도 끝날 수 있는 무모한 계획을 앞두고도 굉장히 의욕적인 우리가 어색하면서도 전에 없던 행복을 느끼는 여름밤이다.
-Ho
2020년 6월 7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