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인하다"

도란도란 프로젝트 - 사백 세 번째 주제

by 도란도란프로젝트

애써 외면하던 것들은

제 색채를 계속 빛내고 있었다.


그 자리에, 그 시간을

온전히 견디면서.


어쩌면 내가 덮어둔

진짜 진짜는,

계속 저를 봐달라

소리치고 있었을지 모른다.


사실 나는 알고있었다.


알면서도

마주보는게 두려웠다.


내가 너무 초라해질까봐

내가 너무

작아질까봐,


나라는 사람이 사실은

저 모래알보다 못난

사람이라는 걸.



-Ram


처음 네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느 정도 아주 약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뿌리치지 못한 네가 원망스럽기도 했어. 알고 지낸 기간, 친밀감의 깊이, 단순히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것에 대한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아마 네가 더 잘 알고 있었겠지. 근데 난 네가 그렇게 위험한 선택을 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정말 차라리 내가 그랬으면 그랬지, 넌 절대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그렇게 시작한 네 이야기를 들은 후 처음엔 괜히 어떤 이야기들만 들려오면 내 마음이 다 조마조마했고, 혹시라도 흔히 드라마에서만 보던 일들이 네게 생길까 봐 혼자 얼마나 머리가 쭈뼛했는지 몰라. 마치 예전에 네가 그 새벽에 나 때문에 문자 한 통을 받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상상하기도 싫은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차라리 내가 정의의 사도처럼 나서서 모든 것을 망쳐놓아야 했을까라는 정의감인지, 의무감인지 모를 생각이 들기도 했어. 또 한편으로는 내가 고민하고 있을 이 시간에 그냥 누구라도 그렇듯 자연스럽게 멀어지길 바라기도 했어. 과거 전공 시간에 배운 '인지 부조화'라는 단어가 다시 떠오르면서, 마음속에 수많은 갈등이 내재하고 있었는데, 결국 겉으로는 내가 그걸 묵인하는 것 같이 보이더라. 그때 내가 뭘 하지 않았던 것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다행이지만,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도 아직은 모르겠어. 그저 난 네가 안전하길 바랄 뿐이야. 너의 바람처럼.



-Hee


남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사기당하기 딱 좋은 유형의 표본에 정확히 해당되는 부모님이 드디어 어딘가에서 사기를 당하는 중인 것 같다. 주식에 손댔다가 살고 있던 집을 날렸었던 이모부를 보고서 어떤 교훈이라도 얻었던지, 여태까지는 멍청하리만치 성실하게 일하고 아껴 사는 게 전부인 줄로만 알고 계셨어서 별 걱정 없었는데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요 몇 달 사이 평생 모아온 돈을 투자한답시고 어디론가 내어주셨다. 주식 같은 것일랑 생각도 말라는 말씀을 늘 하시던 내 부모님이 맞나 싶었다.


글쎄, 수익이 어떤 구조로 발생하는지, 어떻게 수익률이 안정적으로 나올 수 있는지 설명은 못 하겠는데도 1년 뒤면 무조건 300% 수익이 날 것이란다. 믿을 만한 친한 지인이, 어느 나라에서 부대사관을 했었던 공인이, 어느 지잡대 교수가 같은 곳에 투자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나 뭐라나. 대통령도 사기 치고 감옥 가는 세상인데도 오직 믿음으로만 가는 모습이 마치 신천지에 푹 절여진 교도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며칠만 공부하면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싸구려 홈페이지, 돈을 찾고 싶어도 바로 출금할 수 없다는 이상한 시스템, 말도 안 될 정도로 높으면서도 안정적인 수익률. 검색 조금만 해봐도 나오는 피해 사례들을 들먹이며 형과 함께 며칠 뜯어말렸는데도 별 소용은 없었다. 인터넷에 나오는 것들은 믿을만한 게 못 된다는 게 이유였다. 어떻게 알고 찾아보나 싶은 극보수 유튜브는 철석같이 믿으면서.


별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오고 며칠 뒤 부모님께 연락이 왔다. 사업 설명회를 하니 나도 좀 가서 배워보라는 말을 하는데 화가 좀 났다. 다단계 같기도 하고 이단 종교 같기도 한 곳에 나까지 밀어 넣으려 작정했느냐고, 왜 내 인생을 더 망치려 드냐고 소리를 좀 쳤다. 자식들 말을 야속하리만치 무시하길래 그 섭섭함을 좀 돌려주려고 결심한 듯이 크게 말이다. 전화를 끊고는 명절까지도 찾아가지 않고 연락도 일절 받지 않았다.


몇 주간 형도 나도 애가 많이 닳았다. 처음에는 당장 드러누워 죽니 사니 난리라도 피우며 말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제 와서는 달리 방법도 없다 싶었다. 사기가 아니라면 좋은 일이고, 예상대로 사기가 맞는다면 돈을 돌려달라 한다고해서 돌려주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부모님이 정신을 차리든 말든 이미 잃은 돈이니 이 이야기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의 보다 더 궁핍해질 노후 덕에 늘어날 뒤치다꺼리를 걱정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더 시급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Ho


“무난하게 가면 좋잖아, 응? 좋게좋게.”


“너는 위 아래도 없냐?”


“이런건 어쩔 수 없어요.”


“사사건건 이유를 왜 물어요? 그냥 하면 되지.”


“다들 군말없이 하는데 너만 유별나게 왜 그래?”


“다 그런 거야. 그게 삶이야.”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이번 한 번만 넘어가자.”


“몰라, 그냥 좀 해.”


부러진 것들은 다시 붙기 어렵다. 한 번 부러진 것들은 자기 반복 속성을 갖는다. 속성을 보유한 것들은 자신을 재생산한다. 이들의 공격 대상은 자신보다 약한 것들. 아직 부러지지 않은 것들이 위를 쳐다본다. 긴 장대 위로 모가지들이 덜렁거리며 걸려있다. 이들은 번갈아가며 고개를 흔들며 그늘을 만든다.


요즘엔 MZ세대가 뜨겁다. 어떤이는 M과 Z 세대도 나뉘어야 한단다. MZ라고 명명하면 그 외 그룹과 MZ가 섞일 수 없다는 것을 함의한다. 다른 세대는 어떻게 구분하는가? 집합의 맹점은 집합의 구분과 대처방법이 아니라 여집합이다. MZ 구분법 덕분에 MZ라는 말로 세상 곳곳에서 파열음이 난다. MZ라고 잘못 잘라서 그런거다. 쯧쯧. MZ도 아닌 사람이 알지도 못하면서 MZ를 쪼개놓으니 파열음이 나지-라고 하면, 이것은 MZ파열음인가? MZ가 바이럴 될때 가장 이득을 보는 집단은 누구인가?


어느 세대나 침묵하지 않던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여집합이다. 옳은 줄 알면서도 집합이 애써 무시하며 밀어놓은 나머지다.


부러진 모가지들이여. 한껏 꺾인 성대로 힘차게 소멸된 목소리여!


덜렁거리는 모가지들로 쌓아올린 군체(群體)는 침묵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희망의 바람이 아래로 들 수 있게, 기운나는 햇살이 바닥까지 닿을 수 있게 우리의 머리를 부여잡자.



-소고


2021년 9월 26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물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