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물살"

도란도란 프로젝트 - 사백 열 여섯 번째 주제

by 도란도란프로젝트

언제든지 그렇게 될 일이었다.


감정에 쫓겨

내가 허우적대는 줄도 모르고,

쓸리는 줄 모르고,


그렇게 잠기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라고 부르기엔

어렸고,

존경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갖고 싶었다.


마치 물살에 휩쓸리듯

조심스럽게 노니던 날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버렸다.


그리운 욕심은

끝도 없이 깊어진다.


무엇을 품고 있어도

나만이 품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속에 잠겨든 것은

결국 나였다.


결국 밀려나갈 것 역시

나임을 알면서도

파도를 붙잡는 끈은

여전히 잠기고 오르는 것을 반복하다가,


언젠가 사라져버리길 바라는

숨막히는 날들.


내가 사라지고야 끝나갈

고요한 네 주변을

나는 붙잡고 있었다.



-Ram


어떤 시간엔 원래 녹음이 가득한 산 위 리조트에 있어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근데 가보고 싶었던) 말레이시아의 명문 대학교 안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었고,

어떤 시간엔 원래 가장 좋아하는 종이의 집 새로운 시즌을 보면서 마음이 두근두근하고 있어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나는 폭신한 침대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기가 무섭게 잠이 들었다.

어떤 시간엔 원래 파란 하늘 아래에서 예전 호치민에서 입던 호피무늬 수영복을 입고 콘도 수영장을 접수했어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나는 생전 모르는 사람들과 처음 만나서 인사를 하고, 내 소개를 하고, 비즈니스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떤 시간엔 원래 가장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딸기케익과 그린티라떼를 마시고 있어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나는 원두의 출처도 궁금하지 않고, 맛도 기대되지 않는 카페에서 별다른 선택지 없이 아이스 라떼를 주문한 후 최선의 옵션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보니 나는 신나게 테니스를 치고 있었어야 할 시간에 듣도보도 못한 용어들을 열심히 머릿속에 넣고 있었고,

어쩌다 보니 나는 원래 예정되었던 출근 날짜에 부랴부랴 매우 추운 한국을 가게 될 운명이 닥쳤다.

이렇게 상황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는데, 여전히 마음속엔 풀리지 않는 몇 가지의 물음표가 남아있다.



-Hee


적어도 몇 개월 전까지는 결혼이 나와 큰 관계없는 것처럼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은 코앞에 닥친 것 마냥 가까이 다가와 있다. 혼인신고를 이미 해버렸기 때문에 가깝다는 말은 성립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하자면, 결혼은 당장이라도 나를 박살 낼 것 같이 달려오는 과속 덤프트럭이고 나는 도로 위에 묶인 채 어디로도 피할 길 없이 트럭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할까.


무서움.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주는 느낌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남들 다 하는 일을 따라서 함에 있어서 오는 안도감 같은 것은 낄 겨를이 없었다. 더군다나 혼인신고 이후로 삶은 급물살을 탄 것 마냥 크게 변화하고 있다. 새로운 가족이 (아직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처남과 강아지까지 포함해서)넷이나 생겼고, 근무지를 다시 수도권으로 옮겼고, 한겨울에 다시 한번 이사를 했고, 뜬금없이 진급을 했고, 뜬금없이 청약에 당첨돼 내 집이라는 게 생겼고...


마음졸임 없이 숨을 좀 편하게 쉬고 싶다. 물살을 타고 폭포 아래로 떨어지지는 않을지, 암석에 처박아 가라앉지는 않을지... 긴장감과 걱정은 눈을 질끈 감아도 없어지지 않는다. 적어도 결혼식이 끝나는 내년 유월까지는 계속 이럴 것만 같다.



-Ho


바삐 흘러가는 하루 속에 우연히 모든 주제가 맞아 떨어질 때가 있다. 영화 속에서 들었던 노래가 거리에서 흘러나온다거나, 내가 머릿속으로 되뇌고 있는 말을 상대가 읊는 때가. 세상은 내게 한 치도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가끔은 세상이 내게 어떤 말이라도 건네려는 듯 할 때. 그럴때엔 무슨 일이라도 터지지 않을까. 메시지란 무엇일까 조마조마하다. 자연의 섭리란 느긋하다 싶다가도 폭풍처럼 극적이며, 시냇물처럼 노곤하다가도 사구처럼 깊다. 세상사 쉽지 않지만 그래도 살아야 함은 깊게 그리고 크게 휘말렸다가도 어느 순간 해 뜨고 새 지저귀는 풍경을 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럴땐 하늘도 무심하시지 싶다가도 하늘이 유심하신듯 싶다.



-소고


2021년 12월 26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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