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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

도란도란 프로젝트 - 육백 열 두 번째 주제

by 도란도란프로젝트

왔다.

그가 오고야 말았다.


온통 뜨겁고 작열하던

여름이 가고

빼꼼한 가을.


시간은 여러갈래로 달리면서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꿉꿉했던 공기는

제법 사그라들어 건조함을

뽐낸다.


목이 제법 그 간질거림을 느낄 즈음

밤공기가 어둡고 짙게 깔린다.


가을은 가을대로

외롭고 충만한 날이다.


하늘이 높아지면서

한없이 좋아진다.

그리고 부쩍 빨리 해가 지면서

밤이 되면,


맨살에는 냉기를 느끼고

코끝을 건드는

찬바람이 제법 매서워진다.


가을밤을 느낄때마다

여름을 사랑하는 친구와

유난을 떨어본다.


벌써 가을이 왔다,

여름이 가버렸다, 이런 유난을 부리며

우리는 또 지나가는 한 해를

바라보고 있다.


행복의 날은

가을밤 조잘거리며

커피를 홀짝이고

볶음밥을 눌러먹는 날에도

계속해서 생겨난다.


그 사이사이에 가을밤 냄새가 나거든.


나의 사랑 여기저기에서

그런 향기가 나.



-Ram


이유 모를 변덕과 불안함이 가득한 날이 있었다. 다음날은 뉴욕 여행을 가는 날이었는데, 비 오기 전 날씨라 하늘은 회색빛이고 가을이라 일교차는 커서 밤만 되면 으실으실 추웠다. 일 년 전부터 계획된 여행인지라 일주일 전부터 꾸역꾸역 여행 짐을 싸긴 쌌는데 영 기분이 안 났다. 나와 일 년 내내 신나게 뉴욕 여행 계획을 짜던 친구도 역시 나와 동일한 마음인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때가 되자 누군가에게 등 떠밀리듯 공항으로 떠났다. 공항에서 체크인을 하자 조금씩 여행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보딩 시간도 잊은 채 떠들고 놀다가 방송에 이름이 불렸고 머쓱하게 탑승구로 뛰어갔다. 인생에 길이길이 기억 남을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뉴욕도 한국과 비슷한 가을이었다. 다만 아침과 저녁에 한국보다 조금 더 추웠을까. 낮에 열심히 돌아다니다 마지막 일정으로 해가 막 질 즈음 노이에 갤러리에 도착했다. 이미 갤러리 입구부터 두어블럭 정도 사람들이 기다랗게 줄을 서고 있었다. 우리도 얼른 그 줄에 합류했고 점점 어두워질수록 니트 하나만 달랑 입은 내 몸이 덜덜 떨렸고 그런 나를 발견한 친구는 나를 껴안아 주었다. 그렇게 오들오들 떨다가 20~30분 정도 지났을까. 드디어 입장을 했고 클림트 작품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우리의 목적은 오로지 클림트였기에 다른 작품들은 적당히 훑어보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낮에 센트럴파크에서 신나게 자전거를 탄 것에서 모자라 추위에 떨며 이미 지친 우리들은 어두운 센트럴파크를 가로질러 호텔로 향했다. 센트럴파크의 지리를 잘 몰라서 그냥 정처 없이 걷다가 어떤 젊은 커플 뒤를 우연히 좇게 되었는데 그들은 단지 어두운 곳을 찾으러 갔을 뿐이었고, 그 사실을 깨달은 우리는 다시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그러다 옆을 봤는데 너구리들이 두 눈을 밝히며 우리를 견제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너구리들과 눈이 마주친 우리는 혹시 너구리들이 공격하지 않을까 싶어서 팔짱을 꼭 끼고 걸음을 재촉했고 드디어 사람들 무리에 합류해서 무사히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가을만 되면 우습고 무모했고 겁 없이 돌아다니던 뉴욕이 떠오른다. 늘 뉴욕을 같이 갔던 친구에게 뉴욕에 가고 싶다고 안부를 전한다. 그렇게 몇 해가 흐르고 어느새 브루클린 하이츠에 다시 가서 야경을 함께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일 사람은 이미 정해졌다. 이제 뉴욕을 언제 갈 지만 정하면 될 것 같은데.



-Hee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왔는데도 이미 지나간 여름을 여전히 아쉬워하는 중이다. 가장 싫어하는 계절이 여름이 맞았던가, 이제는 조금 아리송하게 느껴진다. 가을은 분명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말 것이란 사실에 벌써부터 조급해진 탓이다. 짧은 계절을 좋아하다 보면 사람이 필연적으로 충동적이게 된다. 가을 야구, 축제, 단풍, 등산과 캠핑, 마라톤. 당일치기로 여행을 떠난 사람처럼 다급한 마음에 욕심을 잔뜩 부풀린다.


요즘은 그토록 즐거운 일들과 멀어지려고 연습하려다 보니 서운한 마음이 자꾸만 불어난다. 그런데도 안심이 되는 건 언제든 어떠한 형태로든 나는 잘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이유 없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계절이 아무리 이상하게 변해도, 찰나와 같이 짧아져도 매년 반드시 돌아오는 가을 속에서 선선한 밤 산책과 환절기의 싱숭생숭함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겠지.



-Ho


선선해지는 가을이 되는 게 항상 싫었다.

더운 것도 싫지만 추워지는 건 무서웠고 겁이 났다.


가을이 빨리 지나가길.

추운 게 조금이라도 빨리 익숙해져 두려워지지 않길 바랐다.


그런데 올 해는 달랐다.


선선했던 바람도, 까맣던 밤하늘도, 우리를 비추던 조명도 다 느껴졌다. 여러 얘기가 오갔고 얘기 안에서 본질과 의미에 집중했다. 철학적이기도 또는 낭만적이기도.


이런 순간이 한 번은 오길 바랐다.

아무 걱정없이 이 순간에 집중하며 서로를 바라보길.


서로는 깊은 곳까지 들어가 후벼팠고 그 이야기의 끝은 꼬리의 꼬리를 물어 밤이 깊어져만 갔다.



-NOVA


2025년 9월 28일 도란도란 프로젝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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