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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Mar 28. 2019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자  가운을 입어라

민 약사님. 어제 그 환자 말인데요.


 내가 이렇게, 공연히 일 잘하고 있는 근무약사를 들볶고 있다면 그건 필시 가운 때문이다.    


 약대를 비롯한 대부분의 자연과학대에서는 실험실 수업에 반드시 위생복(가운)을 챙겨와야 했다. 가운을 안 가져오면 감점하는 조교도 있었는데 짐작컨대 그는 학생들을 몹시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교의 그런 갸륵함에 미루어 짐작하기를, 가운이란  "약품이 옷에 튀면 ‘빵구’가 나므로 입어줘야 하는 옷"쯤으로 알고 있었다.  

 실험 수업이 있는 날은 골칫거리였다. 아 가운 때문에 영 폼이 안 나잖아. 여학생들은 조금 큰 핸드백에 넣었고, 남학생들은 주로 교련가방에 구겨 넣었다.


 오십 다 돼 생애 처음으로 약국을 인수하기로 하고 근무를 시작했는데 약국에서 주는 약사가운을 입던 날 거울에 비춰본 내 모습은... ㅋㅋ 영락없는 이발사 혹은 건강식품 판매원이었다.

 나는 치렁치렁한 긴 가운을 벗어버리고 재킷 스타일의 가운을 따로 주문해서 입었다. 어떤 제약사 영업 직원은 내 가운이 하도 튀어서 약사 아닌 줄 알았다나 뭐라나. 대학병원 의사나 의과대학 교수들이 과거의 길고 칙칙한 흰 가운 대신 세련된 미색 재킷을 입는 것을 요즘은 종종 본다.      


 약사의 가운은 그러니까 학생 시절 입던 그 위생복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가운 속에 입은 의복을 오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덧입는 옷이 아니라는 소리다. 당연한 말이지만 갑옷이나 작업복도 아니다. 


  작업복이라 부르지 않겠습니다, 유니폼이라고도 부르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컴퍼니웨어라 부릅니다.


 이런 라디오 광고를 처음 들었을 때 (의류회사에서 낸 아이디어였을까 아니면 광고기획자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까) 나는 그 안목에 감탄했다.     


 옛날 옛적에 가문을 상징하는 성(姓)이나 직함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요소였다면 현대에는 직업이 그 역할을 한다. 옷도 한몫을 차지한다. 약의 전문인. 그 상징이 바로 약사의 가운이다.


 약국에 들어서서 가운을 입는 행위만으로도 마음 자세가 달라질 날이 올 것을 기대하며 그날 처가운을 입었고, 이름 석 자를 넣은 명찰 앞에서 어떤 책임감까지 스멀거렸던 기억이 난다.     


사족1.

가운이 이상(理想)이라면 현실적으로 중요한 건 신발이다. 굽만 낮다고 대수는 아니다. 굽 없이 납작한 신발이 가장 안 좋다. 아픈 다리도 다리지만 그런 신발을 신으면 발바닥이 불에 덴 듯 화끈거린다. 딱딱한 바닥에 완충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신발이 최고다. 소위 효도신발, 건강신발이라 부르는 콤포트 슈즈는 서서 일하는 약사에게도 필수적이다.     


 멋진 원피스나 슈트에 하얀 가운을 걸치고 (그것도 앞단추를 모두 풀어헤친 채!)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멋진 약사나 의사 그림? 놉. 그건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 뿐 족저근막염이이나 하지정맥류를 자초하는 짓일 뿐이다.


 오늘 당장 가져가서 빨아 오겠습니다.

 민 약사는 퇴근하면서 자신있게 말했지만 글쎄... 과연 그럴까. 다음날 출근하면서 나는 집에 있던 여벌 가운을 가져갔다.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아서, 세탁기에서 꺼내자마자 털지도 못한 민 약사의 가운은 손으로 일부러 비벼놓기라도 한 것처럼 마구 구겨져 있었다. 싱글족이 어디 다리미까지 갖출 수 있겠나. 깨끗하지만 여전히 구겨진 가운을 입은 민 약사에게 내가 가져온 각 잡힌 빳빳한 가운을 내밀었더니 민 약사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자신을 "어이!"라고 부른 중년남자 앞에서 구겨졌던 어제의 자존감도 함께 펴졌기를 나는 바랐다.


사족2. '팜파라치'들에게 충고 하나.

 법이 바뀌어 이제 약사는 약국 안에서 가운을 입지 않아도 됨. 가운 벗고도 일 잘하고 있는 약사, 공연히 사진 찍어 고발하는 뻘짓하면 무고죄 성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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