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로환이라는 약이 있습니다. 일본이 러시아를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약 이름에까지 드러낸 매우 정치적인(?) 약이이죠. 게다가 크레오소트라는 방부제까지 포함하고 있었어요.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늘 먹던 약이라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 굳이 먹겠다고 고집하니 그냥 넘어가고, 젊은이들이 정로환을 찾으면 내게 잔소리(아니 긴 소리)를 들어야 했던 약입니다.
어른들이 즐겨(?) 복용하고는 자녀에게 먹이기 시작해 어릴 때부터 습관이 된 약이 몇 가지 있는데 대개가 소위 '안 좋은' 약들입니다. 지금 말하려는 정로환이 그러하고, '판'으로 시작하는 물약 시리즈들(종합감기약임에도 대개가 두통약쯤으로 알고 있지요. 판피*, 판*, 또다른 판* 등등. 카페인 무수물 함량이 너무 높습니다)이 그렇습니다. 너도 먹어봐, 하면서 할머니가 주셔서 복용하기 시작했다고 젊은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곤 하지요.
정로환은 크레오소트를 주성분으로 하는 약입니다.
크레오소트가 뭐냐하면 목재가 썩지 말라고 사용하던 페놀 화합물의 혼합물로,
발암물질로 알려져 있어요.
우리나라에 변변한 약이 없던 시절에 일본에서 들여온 이 약을 드셨던 어르신들은 어쩔 수 없이 복용하고 계시지만,
젊은 분들은 처음부터 아예 복용을 시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증상을 말하고 약사의 지시대로 다른 약을 복용하세요.
정로환을 달라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긴 소리를 하고, 증상에 따라 지사제나 장을 따뜻하게 하는 약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왜 약이 계속 나와요?"
이 물음에는 내가 답을 해줄 수 없었죠. 이소프로필안티피린 성분이 들어간 <두통 치통 생리통에 게*린>이 그러하듯, 크레오소트가 든 이 약이 없어지지 않고 (허가가 취소되지 않고) 계속 생산되는 이유를, 민초 개국약사에 불과한 내가 알 길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부작용이 크다고 생각해 내 약국에서 일체 취급하지 않고 있는 약이 세 개가 있는데요. 한국인의 두통약이라는 뻔뻔스러운 게*린, 붙이는 멀미약 키미테, 그리고 정로환.
붙이는 멀미약 키미테 어린이용은 다행히 2015년 전문약으로 분류되었지만, 성인용은 지금도 계속 일반약으로 남아 있습니다. 외국인들이 찾을 때 내가 외국어로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어 아주 소량만 갖추어 두는 이 약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자세히 나와 있으므로 내가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어린이용 키미테에 이어, 드디어 내 고집이 빛을 보았습니다. 동성제약은 마침내 정로환 당의정의 리모델링에 들어갔고, 2019년 7월 초에 크레오소트가 빠진 약이 새로 출시되었습니다. 새로운 제품의 이름은 정로환F(에프)정. 정로환의 명성(나는 악명이라 하고 싶지만)은 계속 이어가고 싶은 모양이지요.
크레오소트가 들었던 2019년 7월 이전의 정로환
약이 달라진 것에 작은 보람을 느낍니다. 물론 내가 딱히 한 일은 없어요. 다만 내 약국에서만큼은 취급하지 않겠다고 고집했고 환자들에게 끊임없이 환기시켜준 것뿐.
아. 개비스콘과 스트렙실도 우리 약국에는 없습니다. 가습기 살균제로 수없는 인명을 해치고도 반성하지 않는 영국 옥시 社 제품이기 때문이지요.
취급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심지어 불쾌해 하기까지 했던 사람들은 이 사실을 기억하려나요.^^
어쨌든 누군가는 이런 사실을 기억하고, 약사라는 직능과 역할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