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수는 낡은 소형 탑차에 시동을 걸었다. 올해로 십 년이 되는 구닥다리 차지만 두 식구, 아니 조금 있으면 세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소중한 보물이다. 미사2동에서 아홉 시에 영식이를 픽업하기로 했으니 조금 빠듯했지만 녀석의 평소 행태를 감안하면 그리 늦은 것도 아니었다. 며칠 전 같은 폭설만 아니라면.
일주일 만에 간신히 잡힌 일감이었다. 산달로 들어서면서 유달리 공처럼 둥글게 튀어나온 배를 한손으로 받치고 나머지 손으로 도시락을 건네며 착한 아내가 말했다. 편의점 라면 먹지 말아요.
1차 러시아워가 조금 일찍 시작되는 월요일이라 이십 분밖에 안 걸렸다. 역시나. 도착해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즈음에야 헐레벌떡 뛰어온 시늉을 하며 영식이 조수석 문을 당겼다.
"이런 씨팔. 열어달라고 하라니깐!"
간신히 붙어 있는 문손잡이를 그렇게 잡아당기면 결국 수리해야 한다. 카센터에 일단 들어가면 연식이 꽤 되는 고물차라 몇 만원은 우습게 깨진다.
"짜식. 찌질하게 굴기는. 내가 일 잡아왔잖아."
혹시 하는 기대를 가졌었는데 업자와 만나기로 한 곳이 교통회관 뒤편 빌딩이란다. 치수의 기분이 갑자기 좋아진다.
전시회가 며칠 있으면 끝난다는 것을 치수는 알고 있었다. 뮤지엄까지는 집이 있는 와부에서 삼사십분이면 되는 거리였지만 치수가 따로 시간을 내기는 쉽지 않았다. 탑차 끌고 다니는 주제에 당치도 않다고 하겠지만 바스키야는 어릴 때부터 치수가 좋아한 화가였다. 여동생만 둘인 것도, 일곱 살에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무엇보다 아버지에게 쫓겨난 것까지. 스물 일곱에 죽었다는 건 치수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치수도 벌써 올해로 스물 일곱 살이 되었다.
네비에 교통회관을 찍으니 눈을 붙이고 있던 영식이 한소리 한다.
"뭐하러 벌써. 아직 시간 있는데. 어디 가서 당구 한 게임 하자."
"근처에 볼일이 좀 있어. 곧장 가자. 끝나고 한잔 살게. 30분이면 돼."
잠실 롯데타워는 주차비가 비싸기로 유명하지만 전시회 티켓을 보여주면 할인이 된다고 한다. 그간 적립해둔 온라인 구매 포인트에 더해 생돈 7천원을 결제하고 나니 치수는 아내가 좋아하는 치킨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다. 젠장 월요일 오전인데 조조할인 안 되나.
올 때마다 입구가 항상 헷갈린다. 출구도 여럿이었다. 롯데뮤지엄에서 열리는 것만 알았지 평생 가본 적이 없는 치수는 일단 접근이 가장 편한 쪽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다리를 건너오면서 안쪽 차선에서 좌회전을 받는 바람에 좀 무리하게 우측으로 붙으려는데 다행히 뒤따르던 빛나는 사륜마크의 은색 세단이 속도를 줄여준다. 끼어들어 주차게이트 앞에 닿으니 치수 앞에 선 차도 독일제 사륜 엠블럼이다.
"저런 차는 누가 타나..."
"강남에선 저거 다 국민차야. 얼마 안 해."
얼마 안 하기는. 영식은 언제나 허세가 심하다.
바로 그때였다. 꽈당.
돌아보니 은색 세단이 치수 옆을 스친다. 조금 전 끼워주었던 차가 치수와 엇갈려 좌측으로 빠지려다 치수네 탑차의 좌측 꽁무니를 박은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아줌마. 조심하셔야죠."
영식이 치수보다 먼저 설레발을 친다.
치수가 내려 차를 확인하니 모서리만 살짝 긁혔다. 당황한 기색의 여자가 차에 둔 휴대폰을 가지러 간 사이 영식이 빠르게 말했다.
"야 너 어제 돼지꿈이라도 꿨냐."
"무슨 소리야."
"순진한 척 하기는. 딱 봐 봐. 견적 나오잖아. 우리를 구해줄 눈부신 외제 차잖아. 다 내 덕인 줄 알아."
" ......"
여자가 연락처를 남기고 떠나고, 치수는 일단 주차장으로 진입해 차를 세웠다.
"병원부터 가자. 자식, 재주도 좋아. 운전대만 잡아도 미순씨 미역 값 버네? 비싼 미역. 흐흐흐. 아, 나 허리 아파서 어제도 물리치료 받았는데, 앗싸."
잠깐 사이 치수의 뇌리에 부른 배를 손으로 받치며 도시락을 건네던 아내가 스쳤다. 치수가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상황을 깨끗하게 정리해 준 영식이 녀석을 고맙다고 해야 하나. 고개를 저었다. 치사해도 할 수 없어...
보험사 전화에 치수는 차에 동승자도 있었으며 허리며 목 뒤가 이상하니 둘다 병원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잠시 후 저쪽 운전자가 동의 못 해주겠다고 한다는 전화가 다시 왔다. 다친 데는 없으시죠. 죄송해서 어쩌나.. 하던 해맑은 얼굴이 대인접수는 거부했다는 소리다. 어차피 엎지른 물이었다.
"볼일 있다더니 어떻게, 일부터 볼래?"
"아니. 그냥 진단서부터 끊자. 차는 동네 아는 센터에 전화해놓으면 되고."
단호하게 말하는 치수 눈에 검은 색 포스터가 들어왔다.
JEAN-MICHEL
BASQUIAT
Roalty, Heroism,
and
the Streets
장 미쉘 바스키아 · 거리, 영웅, 예술
'바스키야든 바스키아든 개뿔, 먹고 살고 볼 일이야.'
환자 두 명이 오징어 다리를 물고 화투를 치고 있는 병실에서 영식과 식어빠진 도시락을 나눠 먹으며 치수가 중얼거렸다.
딩동,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아까 사고났던 사람입니다. 보험처리하기로 했어요.
당장 눈 앞의 이익이 물론 탐나시겠지만
훗날 돌이켜 볼 때
스스로 부끄러워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치료 잘 받으세요.
마치 살을 짓이겨 파편으로 흩뿌리는 둣 병실 창밖으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