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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또황 Oct 29. 2020

 <퇴근의 쓸모> 9편. 그냥 하는 말이 어디 있어?

9편. 그냥 하는 말이 어디 있어?


열 몇 살 때 방파제에 머리를 엄청 세게 박고 *기절한 적이 있다. 그때 머리를 다쳐서 그런 걸까? 가끔 이렇게 많은 새로운 것들이 흘러넘치는 세상을 따라가기에는 내가 모자라다는 생각도 할 만큼, 부또황 시티는 슬로우 시티다. 그게 뭐냐면 나는 아주 천천히 듣는 귀와 천천히 읽는 눈을 가졌다. 


천천히 듣는 귀 덕분에 한 번에 많은 소리를 듣고, 아주 작은 소리까지 듣는다. 외국어를 공부하기에는 몹시 유용했지만 일상생활에서 이런 귀는 하루 동안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시킬 뿐이다. 천천히 읽는 눈은 모든 글을 온 마음으로 읽다가,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글도 정독을 해야만 직성이 풀려서, 그 많은 것들을 읽다 못해 결국 팔로우 취소하고 에너지가 있을 때 따로 들어가서 보는.. 변태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나는 그런 변태.. 아 아니 천천히 읽고 듣는, 에너지효율은 5등급이지만 대신 온 마음을 다하는 눈과 귀를 싫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좋아했다.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을 만큼 빠르게 글을 읽는 사람이나 누가 얘기할 때 스마트폰을 뒤적거리는 사람보다 ‘잘 듣고 잘 보고 있으며’ 현재에 더 충실하고 있다고도 생각하면서.. 오만하게도.. 육만하게도..


추석 때 엄마 집(부산)에 갔다가 추억 상자에서 옛 친구에게 받은 편지를 한 장 꺼내 읽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감동을 엄청 받았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랬을 텐데, 왜 생각지도 못했을까 생각해보니 이전에는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같은 편지인데, 몇 년 전에 읽었을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애정이 단어 단어마다 가득했다. 그래.. 그냥 하는 말이 어디 있어? 다 관심이고 애정이지.

회사에서도 생각지 못한 일이 있었다. 요즘 <여기 사람 있어요> 후기가 많이 줄었다며 풀죽어 지냈는데, 지난달에 하차하게 된 에디터놈.. 아니 님들에게 선물로 주려고 2월부터 받은 후기를 싹 모아봤더니 후기가 꽤 많은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회사 일이다 보니 그랬겠지만, 언젠가부터 메일 열어본 횟수, 클릭한 횟수, 후기 갯수같은 숫자에만 집착하며 끙끙 앓다가 우리 뉴스레터 아무도 안 읽는 걸까 봐 그만두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는데, 왠걸 다시 보니 후기는 많았다. 그리고 그 많은 후기들을 읽다 보니 힘이 났다. 따뜻해졌다. 맞아.. 나한테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었는데.

그렇게 요 몇 달 유독 추웠던 마음을 데울 방법을 또, 찾았다. 여태 받았던 후기들 편지들 싹 모아놓고 퇴근 후에 하나씩 꺼내 보는 짓을 하기로 했다. 뭐야 나 낭만적이네.. 낭만 항구 목포 시티에 살아서 그런가.. (구독자 샘들: 외면한다) 이번에는 더 천천히 읽어야지. 더 오래오래 따뜻하도록.. 천.. 천.. 히.. 달.. 팽.. 이.. 처.. 럼.. 패.. 닉.. 의.. 달.. 팽.. 이.. 를.. 좋.. 아.. 하.. 세.. 요..? 저.. 는.. 좋.. 아.. 해.. 요..!



* 열 몇 살 때 방파제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아빠가 ‘어망에 고기 잡아놨다’며 구경하라길래 어망 끈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는데, 그 끈은 어망 끈이 아니라 방파제에 박혀있는 쇠줄이었고, 그대로 시멘트벽에 머리를 엄청 세게 처박고 기절함. 지금 생각해도 너무 어이없어서 굳이 적어본다.







* <여기 사람 있어요>가 더 궁금하다면?

https://emptypublic.com/we-are-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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