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2024년 여름에는 유독 바다에 붙어 지냈습니다.
강릉으로, 속초로, 부산으로 참 많이도 다녔습니다.
어쩌다 보니 강릉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두어 달 만에 시부모님 거처를 대구에서 강릉으로 옮기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향후 몇 년 동안은 강릉이 제2의 고향이 될 예정입니다.
또 올여름은 유독 머리가 복잡하기도 했습니다.
강릉으로 이사하자는 마음이 그냥 들었을까요.
삶의 모든 기준축이 흔들린 한 해였습니다.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었지만,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변화’는 스트레스입니다.
일과 삶이 꽤나 단순해졌음에도 서울을 떠날 결심을 쉽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막 자리 잡은 프리랜서 일에 벌써 얽매여 버린 것입니다.
반면 선준이는 삶은 꽤나 단순해 보입니다.
오늘 밤은 어디에서 자게 될지 별로 불안해하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엄마만 같이 있다면요.
저도 어렸을 때에는 그랬습니다.
내일을 걱정하지도, 오늘을 반성하지도 않았습니다.
쾌활한 어린이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계산이 복잡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른의 삶은 아예 단순한 구석이 하나 없어 보입니다.
주문진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머릿속 복잡계가 쓸려나가도록 파도를 코끝에 불어넣어 봅니다.
시작은 명상이었는데 끝은 단잠입니다.
정강이에 화상을 입을 정도로 곯아떨어져버렸습니다.
엄마가 흐트러진 호흡을 바다에 무단 투기하는 동안, 선준이는 새끼복어를 잡는 데 선수가 다 되었습니다.
잡고, 풀어주고, 잡고 풀어주기를 반복합니다.
새끼손톱만 한 복어를 손에 올리고는 월척이나 건진 듯 자부심이 넘칩니다.
옆자리 파라솔에 자리 잡은 아이는 신나게 모래를 팝니다.
아빠는 아이가 요구하는 대로 바닷물을 끝도 없이 퍼 나릅니다.
모래가 쏙 빨아먹은 자리에 다시 바닷물을 채워 넣습니다.
엄마 아빠가 교대로 헛수고를 하는 동안 아이는 자신의 모래성을 세웁니다.
아이들은 배고픈 줄도 모르고 놉니다.
어른들은 점심시간을 놓치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먹을 것을 사다 나릅니다.
겨우겨우 불러다가 입에 뭐라도 하나 넣어주면 아이들은 잽싸게 바다로 달아나 버립니다.
아이들은 시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누가 정한 삼시세끼인지도 모른 채 시계의 지시에 따라 밥을 먹이려 안달입니다.
오후 6시, 라이프가드들이 퇴근하고 나면, 바다도 문을 닫습니다.
눈앞에 바다는 그대로인데, 돌연 ’출입금지‘입니다.
이번만큼은 어른들도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설득하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다행히 새끼복어가 자연의 리듬에 따라 깊은 바다로 숨어버리자, 선준이도 순리에 따라 바다를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옆 자리 아이는 모래성을 버리고 떠난 지 오래입니다.
하루를 꼬박 써서 만든 모래성인데도 미련 하나 없이 갔습니다.
바닷물을 퍼 나르느라 헛수고한 어른들도 아쉬움을 남기지 않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것, 그것이 ‘모래성 놀이의 규칙’이니까요.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인 건 지난해 가을부터였습니다.
선준이는 동네 친구 윤우와 아파트에서 노는 중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바닥에 쌓인 낙엽들을 한 데 모으느라 정신없었습니다.
뭐 하려나 보니 열심히 모은 낙엽들을 다시 나뭇가지 빗자루로 쓸어버리는 겁니다.
낙엽을 모으고 쓸어 버리고, 다시 모으고, 또 쓸어 버리고.
헛짓을 계속 반복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습니다.
어른들의 삶을 모방한 한 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보고를 위한 보고
관습의 단순 반복
버리기 위한 소비
숫자를 위한 조작
어른들이 하는 일들도 사실 한 발자국만 떨어져서 보아도 모두 모래성이고 낙엽더미입니다.
다만 아이들이 기꺼이 즐기며 하는 일을, 어른들은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뿐입니다.
어른들이 하는 모든 짓들에 모래성과 낙엽더미를 대입하는 순간 저의 일에 대한 관점도 다시 한번 무너졌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사라진다”
루시드 폴은 ‘평범한 사람’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노래하고 또 노래할 만큼 우리는 사라진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합니다.
삶에 죽음을 가까이 둘 수록 더 현명하게 산다고 했던가요.
죽음을 가까이 느끼는 방법 중 하나는 우리가 하는 이 모든 일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명확한 인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낙엽더미, 모래성처럼 흩어져 버릴 일들을 가지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납니다.
‘삶’이란 다소 진지한 과제도 가볍게 접근해 봅니다.
힘주는 동안 너무 힘이 들었으니까요.
놀이 삼아 사는 것.
아이에게 배운 삶의 지혜입니다.
그동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질문이 엄숙한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빨간 머리 앤’은 저의 분신과도 같았고, ‘붉은 돼지’에서 제 속의 아나키스트를 만났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면서 제 이름의 뜻을 찾고 싶었고, ‘원령공주‘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한마디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저의 철학적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래서 거장의 마지막 질문에도 얽매였던 것 같습니다.
진지하게 답해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습니다.
좀 그럴싸하게요.
이제 저의 철학적 아버지에게도 손을 흔듭니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물어보신다면,
저는 그냥 놀이하듯 살겠습니다.
되도록 가볍고 재미있게요.
규칙은 이러합니다.
‘모래성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낙엽더미에 저작권을 붙이지 않는다’
그게 ‘어차피 사라질 삶’이라는 놀이의 규칙입니다.
복잡계의 질문도 단순하게 다시 써 봅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