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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기후

그리스인 조르바

by 황보람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보다 좀 길 거예요.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매달려 있으니까, 이리저리 다니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_그리스인 조르바 | 열린책들 428p.


"멍쿠야 다음 생에는 누나 아들로 태어나라"


요즘 가장 애처로운 시간은 선준이와 밥을 먹을 때입니다.

저는 밥숟가락에 고기를 얹어서 딴청 피우는 선준이 입에 넣어줍니다.

식탁 아래엔 강아지 멍쿠가 대기 중입니다.

뭐라도 하나 떨어지지 않을까 초집중 상태입니다.


고기반찬에 한이 맺힌 아빠 덕분에 저희 집 식탁에는 매번 고기반찬이 올라옵니다.

그래서 식사 시간마다 멍쿠의 ‘자린고비’ 고문이 시작됩니다.

분명 냄새는 나는데 입으로 떨어지는 게 하나 없습니다.


선준이 입에 밥숟가락이 들어갈 때마다 멍쿠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됩니다.

멍쿠는 왜 그 숟가락이 자기 입으로는 들어오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못 이기는 척 멍쿠의 그 큰 입 속으로 숟가락을 쏙 넣어주고 싶습니다.


이미 방광결석으로 두 번이나 수술을 받은 멍쿠는, 최근 들어 간식을 거의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멍쿠는 자신의 방광 상태를 모르기 때문에, 갑자기 간식량을 줄여버린 인간들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멍쿠에 튀어나올 듯한 눈망울을 봅니다.


"멍쿠야 다음 생에는 누나 아들로 태어나라"


미안한 마음에 쓸데없는 말을 뱉었다가, 이내 후회합니다.

'다음 생은 없는데...' 하며 서둘러 뱉은 말을 주워 담아 봅니다.


"근데 엄마가 개로 태어나면 멍쿠는 또 개새끼네?"


엄마 말을 듣던 선준이는, 다음 생에 엄마 아들이 선준이가 아니고 멍쿠가 될까 봐 걱정하다가, 엄마랑 멍쿠가 모두 개로 태어난다는 결론이 마음에 드는지 깔깔 웃어버립니다.


저는 속으로, 다음 생에는 우리 모두 태어나지 않기를… 하고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목줄


2014년 입양 당시 멍쿠는 동물병원에 임시 보호된 상태였는데 저는 첫눈에 멍쿠가 내 새끼임을 알았습니다.

유기견 센터에 수많은 개들 사이에서 내 가족이 될 개를 알아본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정말 한때 저도 개였던 걸까요.

아무튼 굉장한 인연입니다.



오히려 선준이를 낳았을 때는 마음이 다소 복잡했습니다.

'내 아이다'라는 생각보다는 '나와 같은 (고통스러운) 운명의 인간'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아이의 표정이, 그 얼굴이, 세상 고초를 다 겪은 듯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온통 붓고 멍든 아기를 보면서 저는 깊은 연민을 느꼈습니다.

처절한 인간적 연대감.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인류애였습니다.

날것으로서의 인간과의 첫 대면이었고, 죽어서도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은 운명적 연결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 박선준’에게는 일종의 동지애가, ‘개 멍쿠’에게는 모성애가 발동되는 것 같습니다.



멍쿠는 2018년 선준이가 태어나기 직전까지 저와 살다가, 이후에는 시댁인 대구에서 지냈습니다.

흙바닥을 마음대로 훑으며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올해 시부모님이 강릉으로 이사하시면서 서울로 돌아왔고, 개집살이도 다시 시작됐습니다.


아파트는 멍쿠에게 커다란 개집이나 다름없습니다.

깔끔한 성격인 멍쿠는 집 안에는 웬만하면 용변을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데리고 나갈 때에만 마음껏 볼일을 봅니다.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 오줌이 나오는지 한 시간 넘게 산책을 해도 마킹이 끝나지 않습니다.


"아직 더 나올 게 있냐?"


제가 겉옷을 입을라치면, 파블로프의 개가 침을 흘리듯, 멍쿠는 오줌이 마려워지는가 봅니다.

그래서 외출 준비는 극도로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겉옷을 입었는데 안 나간다?

계약 위반입니다.

아무리 착한 멍쿠도 봐주지 않습니다.

앞발로 치고 때리고 뛰어오르고 온갖 난리가 납니다.

사실 멍쿠는 아파트 개집살이를 오래 하면서 오줌을 참는 데 도사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겉옷을 입을 때만 오줌이 마려워진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겠습니까.

물을 덜 마시고 오줌을 참는 게 일상이 된 개는, 어느새 방광에 그 많은 돌을 키워냈습니다.


조용히 죄책감을 삼키며, 오늘도 목줄에 멍쿠를 묶고 산책에 나섭니다.

개가 냄새를 맡고 영역 표시를 하는 건 일종의 사회활동이자, 지적 활동, 놀이, 행복, 취미… 여하튼 견생의 모든 것입니다.

되도록이면 개다운 삶을 만끽할 수 있도록 멍쿠의 신호를 잘 살피며 산책에 나섭니다.


멍쿠가 '주도적'인 산책을 하고 있다는 증거는 목줄의 텐션에서 바로 드러납니다.

멍쿠와 저 사이를 잇는 붉은 줄이 가급적 팽팽해지지 않도록, 속도를 맞추고 방향을 읽어 나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개를 끌거나, 개가 인간을 끌거나 둘 중 하나가 되니까요.


저는 멍쿠를 사랑하는 만큼 줄을 느슨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사실 그 줄 끝에 묶여 있는 강아지에게 제가 해 줄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끈에 묶인 멍쿠를 보면, 멍쿠의 인내심이 얼마나 뛰어난지 새삼 놀라게 되는데, 제가 진로를 바꾸거나, 집에 가기를 재촉하거나, 뒷발질을 못하도록 제지하더라도 이 개는 단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멍쿠의 삶은, 목줄 끝을 잡고 있는 저와의 반경만큼이며, 줄을 핸들링하는 저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마치 기후처럼요.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절댓값입니다.

저는 멍쿠에게 달아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인간 기후'입니다.


만약 개도 수행을 한다면, 아마도 멍쿠는 어떤 경지에 도달했을 겁니다.

적어도 이런 글을 끄적이고 있는 저보다는 높은 수준입니다.


기꺼운 체념.

서렌더.


저라는 '인간 기후'가 정말 괜찮은 건지 멍쿠에게 물어볼 용기가 없습니다.

어떤 답이 돌아올지 두려우니까요.

저는 괜찮지 않았거든요.


# 탯줄


과거에 저는 나를 둘러싼 '인간 기후'가 무척 고통스러웠습니다.

팽팽한 목줄과 감시하는 시선에 숨이 막혔습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유년 시절이 가장 괴로웠을 정도였습니다.

어린아이는 적응하지도, 벗어나지도 못한 채 살아내야 했습니다.

체념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른이 되어 최대한 기후 영향권에서 멀어지는 것뿐이었습니다.

목줄을 끊고 달아나는 겁니다.


풍토병을 이겨내듯 나에게 주어진 조건을 깨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서서히 저는 태생적인 기후에서 벗어났습니다.

벗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선준이를 낳자, 오래된 기후가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저의 ‘엄마’는 선준이의 ‘할머니’가 되어 기후 영향권을 회복해 나갔습니다.


여러 가지 마음이 일어났지만, 나의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아이의 관계까지 망칠 수는 없겠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선택적으로 그 기후를 다시 수용했습니다.

선택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으면서요.




얼마 전 일입니다.

선준이는 할머니집에서 할머니의 스마트폰으로 신나게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감기로 머리가 지끈 거리는 상황에서 아이가 게임에 몰두하는 걸 보니 벌컥 화가 올라왔습니다.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거칠게 빼앗아서 할머니에게 되돌려 줘 버렸습니다.


누구보다 당황한 건 아이였습니다.

할머니는 아이를 달래려고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딱 한판만 더해”


다시 스마트폰이 아이 손에 쥐어지자, 저는 폭발해 버렸습니다.


"그걸 또 주면 어떻게 해? 제발 어른답게 좀 구세요"


뭐라고 대꾸 한마디 못하는 엄마를 뒤로하고 선준이를 데리고 나와버렸습니다.

어른답지 못한 건 나라는 걸 알면서도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엄마의 생신 일주일 전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잖아.

이제는 왜 화조차 못 내는 거야.


제 마음도 박살이 나 버렸습니다.


엄마는 달라져 있었습니다.

이제 저에게는 뭐라고 항변조차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까닥하면 딸이 아예 발길을 끊을까 봐 찬기운을 꼭꼭 숨겨야 했습니다.

딸이 화가 나면 예쁜 손자도 못 보고, 그 좋아하는 사위도 못 만나니까요.

어린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쥐어주어서라도 찾아오고 싶게 만들어야 했던 겁니다.


엄마는 늙었고, 이제 저는 그 쌀쌀맞던 엄마보다 더 쌀쌀맞은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저는 비로소 엄마와 저 자신을 나란히 두고 직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엄마에게서 엄마라는 이름표를 떼어버리자, 덩그러니 사람 하나가 남았습니다.

나와 같은 고통스러운 운명의 인간 말입니다.


우리의 관계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다음 생은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혼자

그냥 한번

생각해 봅니다.


엄마, 다음 생에는 내 딸로 태어날래요.

어쩌면 처음부터 서로의 고통을 알아볼지도 모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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