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커서 뭐 할지 알아?"
자려고 양치를 하는데 문득 선준이가 '장래 희망' 같은 걸 꺼내놓습니다.
언제가 한번 "나는 꿈이 없어"라고 말했기에 무슨 말을 할까 궁금했습니다.
사실 저는 선준이가 꿈이 없기를 바라왔습니다.
꿈이라는 것에 조차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직업 추천을 하거나, 아이의 특성을 분석해 예언 같은 걸 하거나, 무얼 시킬 것이냐고 묻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아이들의 미래를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선준이가 스스로 '내가 되려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건 사뭇 달랐습니다.
얼마나 갈지 몰라도, 그건 중요하지 않고, 아이가 공개적으로 ‘처음’ 드러낸 자신의 욕구였으니까요.
"나 책 만들 거야"
책을 '만든다'는 말이 참 매력적이었습니다.
'쓴다'라는 표현을 안 했다는 점에서 일단 글쓰기와는 다른 형태였습니다.
"어떤 책?"
"괴물 책"
"그림 그려서?"
"응"
어려서 선준이는 꽃에 관심이 많고, 그림도 꽃을 위주로 그렸는데 어느 순간 괴물에 매료되었습니다.
서점에서 책을 보면 무조건 '괴물'이 '배틀'하는 것을 골랐습니다.
책은 무엇이라도 좋다고 생각하는 저는 아낌없이 '괴물도감'을 사주었습니다.
비폭력 평화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배틀’은 어떻게 피해 가기 어렵더군요.
결국 선준이는 이렇게 저렇게 '괴물 책'을 만들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아마 엄마처럼 평범한 사람도 책을 낸다는 점에서 자신감을 얻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한번 선준이가 엄마의 꿈은 무언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엄마는 창조하는 사람이 되는 게 꿈이었는데 꿈을 다 이뤘어"
2024년에 깨달은 바인데요.
저는 꿈을 이룬 사람입니다.
대학 입시 당시 학과를 고르려는데 도무지 끌리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단순하게, ‘나는 무언가 창조/창작하면서 사는 게 적성에 맞겠다’고 생각했고, 그 재료가 ‘글과 말’ 일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그렇게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갔고, 언론학부 심화과정을 거쳐 지금 이모양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에게는 꿈이 없습니다.
되고 싶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이 말은 매우 긍정적입니다.
추구하는 게 없어졌다는 건, 내가 나의 ‘꿈’이라는 허상에도 더 이상 구속되지 않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꿈이 없고 딱히 되고 싶은 것도 없어진 순간 저는 '자유'라는 감정을 획득했습니다.
그간 저를 구속해 온 것은 '미래의 나' 였으니까요.
'미래의 나'에게 아무런 기대도 갖지 않게 된 순간 제 인생은 크게 변했습니다.
저는 꿈을 잃은 그 순간을 '가장 보통의 나'를 만난 날로 기록합니다.
2024년 다이어리를 산 날이었습니다.
이제 2025년 다이어리를 준비하려 합니다.
꿈은 없지만, 2025년 프로젝트는 벌써 가득 차 있습니다.
꿈이라는 허울이 아닌, 프로젝트라는 구체적인 행동이 나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2025년이 아무런 기대가 되지 않고, 반대로 너무나 기다려지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