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_본색을 드러내다

소설

by mina

space_서울 서대문구 안산자락길




작년 이맘때였을까요? 가지에서 떨어져 바람에 날아다니다가 멈추다가를 반복하는 볼품없는 낙엽들과 여전히 가지에 매달려 늦가을을 버티고 있는 몇 개의 이파리들. 아마 그 잎은 겨울이 왔는데도 인정하기 싫었던 모양입니다. 당신이 떠난 지금의 이 상황을 도저히 인정도 이해도 하기 싫어하는 저처럼 말이죠.

아무튼 당신이 나를 떠나간 때는 늦가을과 초겨울의 중간 어디 즈음이었을 겁니다. 그때의 저는 가끔 허한 마음이 들 때마다 헛헛한 발걸음으로 둘레길을 걷곤 했지요. 그날도 당신이 보고 싶어 가슴 한 구석 뻥 뚫려있는 듯 허전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또 같은 까닭으로 저는 산기슭을 걷고 있었던 겁니다. 뭐 늘 그렇듯 늦가을의 정취는 조금 쓸쓸하고 제법 운치가 있지요.

앙상한 나무 사이를 혼자 걷는 저의 모습을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보며, 어쩌면 당신이 멀리서 나를 지켜보면서 조금은 미안한 마음을 가질지도 모른다고 상상했습니다. 그렇게 처연한 표정으로 잘 가꾸어진 둘레길 초입에 들어섰습니다.

잎을 잃은 나무들은 양과 색깔을 잃어버려 본래 어떤 나무였는지 알 수 없게 앙상해 보이더군요. 나무의 본색은 어땠는지 전혀 알 수 없도록요. 나무가 품은 잎들이 선명하고 푸른 활엽수였는지, 뾰족뾰족한 바늘 같은 연둣빛 침엽수인지, 어린아이 손 같이 붉그레한 단풍잎의 모양이었는지 이즈음 늦가을 나무를 봐서는 아무도 모를 테니까요.


당신이 떠나보낸 저는 제 모양을 잃어버린 양 회색빛 풍경 속에 잘 어울렸을 겁니다. 저는 그 흑백의 색깔에 도취되어 나의 색을 숲길 어디쯤 버리고 왔는지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그 일이 발생한 순간에도 그리 놀랍지 않았어요. 집으로 돌아와 신발을 벗고 손을 비누로 닦고 대충 세수를 하고 옷을 하나씩 벗어 화장실 안쪽 벽고리에 걸어둔 뒤, 샤워를 하려고 샤워실로 들어가려다 그 ‘사건’을 발견해 버린 그 순간에 조차도 말이죠.


그러니까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에서 색깔이 없어졌다는 것을 눈치챈 그 순간에도 말입니다.

저는 우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는 뽀얗게 김이 서린 거울 위에 손바닥을 댔습니다. 그리고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내며 거울을 닦아냈죠, 그랬더니 거울 속에 ‘흑백’의 제가 서 있더라고요. 안 믿으시겠지만, 그때 제 몸은 형체만 있을 뿐 살구색이 아닌 잿빛의 몸뚱이만 덩그렇게 비치고 있더라니까요. 마치 거대한 덩어리처럼. 그렇게 색깔이 없는 나의 모습은 거울 속에서 오직 조명의 그림자를 통해서만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어? 나에게 ‘색깔’이 사라졌네


저는 잠시 웅얼거리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를 말리고는 수건으로 몸을 닦아내고 잠시 앉아 생각을 했습니다. 색깔이 사라진 나의 삶에 대해서 말이죠. 그리고 침대로 올라가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색깔이 없는 삶’은 생각보다 순조로웠습니다. 거울 속에서만 드러나는 잿빛의 인간이라니! 뭐 세상은 모를 나만의 비밀이 생긴 것 같아 흥미롭기도 했고요. 사실은 내가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묘한 기대감도 있었고 말이죠. 불편한 점이라고는 미용실이나 목욕탕에 가지 못한다는 것과 친구와 만날 때 큰 거울 옆을 지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수고로움이 요구된다는 점 정도였지요.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더라고요. 아시잖아요?


워낙 대도시의 조명이란 화려하고 사물의 ‘원색’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반짝이니까요. 타인의 본래 색깔이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하기에 사람들은 너무 바쁘잖아요.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손톱이 선홍색이었는지, 오렌지 빛에 가까운 색깔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듯 말이에요.


그렇게 색깔이 없는 삶을 이어가다 오늘 저는 오랜만에 다시 그 둘레길을 찾았습니다. 여전히 앙상한 가을이었습니다. 특히 요 며칠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 때문인지 산책로에는 사람들을 보이가 쉽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제 나의 색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거야. 그냥 이렇게 살아갈 거야.

소란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데크길 쪽으로 더 걸어 들어가니 저 멀리 완전히 나뭇잎이 떨어져 가지만 앙상한 숲길의 입구가 보였습니다.


'작년보다 더 마르고 더 건조해진 풍경을 마주하게 되겠지.'


하지만 저의 두려움과는 달리 데크길 안으로 들어서자 숲길은 환하게 햇빛이 비추고 있었습니다. 마른 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하늘을 보려면 내가 가진 것을 내어줘야 하는 거구나. 길이 보이지 않는 다면 내 잎을 모두 버릴 수 있어야 하는 거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는 왠지 오늘 다시 거울 속에서 저의 색깔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새로운 색깔은 어떤 빛일지 기대하면서 현관문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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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0gz37VKVt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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