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생애주기에 따라 ‘가족’에 대한 평가나 성찰은 달라진다.
아이에게 부모는 우주와 같다고 했던가? 반대로 부모에게 아이는 빛나는 별이다.
그런데, 성장할수록 부모로부터 벗어나려는 아이에게 부모의 세계는 답답하다.
이미 빛바랜 우주의 저편이다.
아이를 낳아 기르던 30대에 내가 만든 새로운 ‘가족’은 삶의 전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 하면서도 귀여운 이 새로운 생명체는 오롯이 나만 보고 태어났으니 이 아이에 대한 무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걸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타 포유류에 비해 미성숙한 상태에서 세상으로 나오는데, 이는 아마 인간의 직립보행으로 좁아진 골반 때문이라고 진화심리학책에서 언젠가 본적이 있다.
아무튼 이 가엾고 조그마한 생명체가 태어나는 순간,
나의 모성애도 자동으로 분비될 줄 알았는데,
웬걸 여전히 나는 내가 가장 소중하더라는 거다!
분명히 (가정시간이었는지 과학시간이었는지) ‘모성’ 혹은 ‘부성’이 타고난다고 배웠던 것 같은데, 아이를 위한 극강의 희생정신이 내게는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부터, 나는 고뇌에 휩싸였다.
게다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린 시절 원부모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크고 작은 정서적 결핍은 나와 아이로 연결되는 또 다른 부모-자식의 관계에서 다시 수면 위로 등장하며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하루하루 아이를 위한 희생에 익숙해질 즈음,
이제야 나의 욕망과 욕구를 내려놓는게 익숙해 질 즈음
힘든 하루에도 아이의 미소에 사르르 피로를 잊으며 살아갈 즈음,
이번에는 아이가 독립을 하겠다니... 거대한 사춘기의 서막이 열리는 시점이다.
내 아이의 사춘기를 감지하는 시점은 제각각일지 모르나, 다수는 ‘스마트폰’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사춘기를 마주하는 경우가 흔하다. ‘스마트폰’이라는 이 요물은 수많은 정보(유익, 무익, 해로운 포함)를 담고 있으니 그토록 청정한 우리 아이에게 사주는 것은 너무 이른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학급에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의 숫자로 해당 지역의 학구열(?)을 파악하는 사람도 있다.
다수의 부모님은 긴 망설임 끝에 혹은 끈질긴 요구끝에 폰을 선물한다.
폰을 쥐어주면서 부모가 아이에게 하는 말은 각각 다르겠지만.
나는 대략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엄마 아빠는 너를 이제부터 믿을 거야. 믿음의 증표로 너에게 폰을 선물할께.”
그러나,
곧 믿음은 깨어졌고
그렇게 사춘기 전쟁이 시작되었다.
3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