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제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경력은 충분했지만, 시작은 다시였다

by 서가

퇴직이 가까워질수록 그는 더 말이 없어졌다.


점심 식사 중에도,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길에서도,

어느 날부터는 사람들의 농담이 그의 귀에 머물렀다가 그냥 흘러갔다.


그가 한 직장에서 27년을 버텼다는 걸

남들은 종종 ‘대단하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는 그 세월을 한 칸씩 구겨진 종이처럼 느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마흔 아홉, 이직도 아니라 퇴직.

“세무사 자격증 있으면 바로 개업 가능한 거 아녜요?”

3년 전, 회식 자리에서 후배가 던진 말이었다.


그땐 그냥 웃고 넘겼다.

그 말이 언젠가 진지하게,

그의 검색창에 남겨질 줄은 몰랐다.


시작은 단순했다.

10년 넘게 세무직 공무원으로 근무했으니,

1차 시험은 면제일 거라고 생각했다.


개업도 어렵지 않겠지.

세무서에만 있어도, 사람을 상대하고,

민원에 세무상담에, 양도세까지 다뤘는데.

하지만 자격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실무수습’.

법령은 말하고 있었다.

국세에 기반한 실무 경험이 필요하다고.

회계법인, 세무법인, 국세청 산하 기관에서 일정 기간의 수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방세?

그건 국세가 아니라고.

그는 자기 책상 옆에 붙은 노란 포스트잇을 내려다봤다.


“지방직 세무, 실무수습 인정 범위에서 제외될 수 있음”


그 문장은 흡사 낙인처럼 느껴졌다.

10년 넘게 사람들을 상대했고,

가산세 계산도 하고, 상속세 문의도 수백 건 처리했는데.


그 모든 기록은 ‘지방세’였다는 이유로

실무수습으로 인정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럼 처음부터 준비해야겠네요.”

서점에서 만난 젊은 수험생이 그에게 말했다.

회계 전공자도 아니면서 세무사를 준비한다니 대단하다고,

그는 말 대신 웃었지만

속으로는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처음부터’라는 말은 왜 이리 낯설고 무서울까.

회계원리 책을 펴놓고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숫자들을 바라보다,

그는 처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렇게 막막했었지.

그때는 청춘이라서 막막함이 용기였다면,

지금의 막막함은 마치 벽 같았다.

돌아 나갈 수 없는 길 끝에서 문득 찾아온 벽.

“선생님은 1차 면제 가능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세부 경력 내용 보고 산업인력공단에 한번 확인은 해보셔야 해요.”

노량진에 있는 한 학원 상담실에서

그가 들은 말이었다.

‘가능할 수도 있다’와 ‘확실히 면제다’ 사이에는

뜻밖에 깊은 골이 있었다.

서류를 뗐고, 경력증명서를 정리했다.

그가 남긴 결재문서와 민원 처리 기록들은

이제 한 장의 문서로 환산되어야 했다.


그의 27년은,

면제 여부라는 한 줄로 정리될 수 있을까.

결국 그는 수습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한 세무법인에서 직원으로 일하며

실무를 다시 배우는 입장으로 돌아갔다.


“생각보다 다르네요.


공무원 때는 몰랐는데, 고객들 생각보다 훨씬 예민해요.”

그가 처음 전표 작성을 틀렸을 때,

옆자리 과장이 조용히 알려줬다.

세무사 자격증보다 중요한 건

그걸 ‘어떻게 활용하느냐’라는 말도 함께.


그는 지금도 자주 물어본다.

‘면제’라는 건 뭘까.

시험을, 수습을, 자격을, 개업을

면제받고 싶었던 것일까.


혹은 그는

그동안 지나온 시간을

누군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기를 바랐던 건 아닐까.


몇 달 뒤, 그는 조용히 개업 신고를 냈다.

그의 사무실 간판은 작고 단순했다.

그날, 개업 축하를 전하러 온 후배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결국 다 처음부터야.

그냥 그걸 인정하느냐 마느냐 차이지.”

그가 그날 마지막으로 내려둔 셔터 소리는

의외로 가볍고 맑았다.


면제되지 않은 것들로도

하루는 충분히 시작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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