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오렌지주스가 흐르는 강

by 심온

나는 책을 읽어주시는 아빠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잠이 들었다.


네 살 무렵, 동화책 속 그림 만으로 작은 글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빠도 글자를 그대로 읽지는 않으셨다.


나는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동화책의 작은 글자들을 하나하나 소리 내어 읽으며, 또래 아이들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한글을 익혀나갔다. 아침이면 신문의 큰 제목들을 읽어내리고, 저녁이면 TV 자막을 따라 읽곤 했다.


부모님께서는 이런 나의 모습을 보며 놀라워하셨고, 주변 어른들께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시곤 했다. 하지만 그 기쁨과 자부심은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해 오래가지 않았다.


설날인지 추석인지는 희미한 기억 속에서 정확히 떠오르지 않지만, 아빠의 고향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 가족은 길게 이어진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흐릿한 불빛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갑자기 "아빠, 저기 사자!"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틀림없이 사자였다.


"사자? 으르렁거리는 사자?"

"응, 사자야!"


터널 안의 조명이 뿌옇게 흐려 보이는 모습은 마치 사자의 갈기털 같았다.


어둑한 터널 벽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조명들이 만들어내는 불빛의 흐릿한 실루엣이, 어린 내 눈에는 마치 사자가 으르렁거리며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매일 안방 침대 머리맡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 책을 읽은 탓인지, 어느새 내 시력은 눈에 띄게 나빠져 있었다.


부모님은 서로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과 함께 후회스러운 대화를 나누셨다. 너무 어린 나이에 글을 가르친 것은 아닌지, 늦은 시간까지 책을 읽게 둔 것은 아닌지 걱정 어린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셨지만,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여섯 살이던 나는 파란 테두리의 안경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동화책 속 똑똑한 캐릭터처럼 보인다며 어린이집 친구들도 예쁘다고 좋아해 주었고, 선생님까지도 안경을 쓴 모습이 더욱 영리해 보인다고 칭찬해 주셨다.


어느 날부터 아빠는 같은 동화책을 반복해서 읽는 게 지겨워졌는지, 아니면 책 읽어 주는 것을 싫어하게 되셨는지, 책을 펼치지도 않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시력이 나빠진 것이 아빠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것 같다. 동화책을 펼치는 것조차 망설이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아빠의 마음을 알 리 없었던 나는, 오히려 책 없이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더 신이 났다.


아빠의 퇴근이 늦어지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배가 아프다며, 빨리 와달라고 조르곤 했다. 기다리다 지쳐 그대로 잠들어버리는 날도 많았지만, 나는 매일같이 아빠의 퇴근만을 기다렸다. 때로는 너무 졸린 척하며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그저 아빠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였다.


그때 아빠가 들려준 이야기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 열린 것처럼 신비로웠다.


아빠는 그제야 오랫동안 간직해 온 비밀을 조심스레 꺼내 놓으셨다. 목소리를 낮추시며 말씀하시길, 아빠가 열 살 무렵 겪었던 일이라고 했다. 그때 아빠의 눈빛에는 어린아이 같은 설렘이 가득했다.


아빠는 세월이 흘러 그 일의 세세한 부분들이 흐릿해졌다고 하셨다. 기억 속에서 실제와 상상이 뒤섞여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시면서도, 그 경험만큼은 분명히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며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 이야기는 우리 둘만의 특별한 비밀이라고 당부하셨다. 친구들에게도 절대 말하면 안 된다고 하셨고, 나는 그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아빠가 다른 세상으로 떠난 어느 흐린 겨울날, 엄마와 함께 아빠의 오래된 물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다가 낡은 책장 깊숙한 곳에서 아빠의 어릴 적 일기장을 발견했다. 바래진 표지와 구겨진 모서리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노란빛으로 변색된 페이지마다 "참 잘했어요" 도장이 정성스럽게 찍혀 있었고, 그 페이지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접힌 쪽지 두 장이 끼워져 있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아빠의 서툴지만 진지한 글씨체였다. 연필로 꾹꾹 눌러쓴 흔적이 종이 뒷면까지 비치는 그 두 장의 쪽지에는, 아빠가 열 살 때 겪었다던 그 신비로운 일들이 놀라울 정도로 자세히 적혀 있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일기장에 적힌 날짜와 쪽지의 날짜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일치했다는 점이었다.


쪽지 한 장에는 옅은 청색으로 그려진 기묘한 생명체가 있었다. 첫눈에는 나비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날개는 반투명한 막 같았고, 몸통은 마치 빛나는 실뭉치처럼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듯했다. 아빠의 서툰 색연필 선으로 그려진 그림이었지만, 그 안에서 신비로운 생명력이 느껴졌다.


노랗게 바랜 그 쪽지를 읽고 또 읽으며 나는 확신했다. 아빠의 그 이야기들은 정말 사실이었다.


수백 번이나 들었던 그 이야기는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아빠의 목소리에 담긴 떨림과 설렘까지도, 한 글자 한 글자가 그대로 내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


이제 그 소중한 이야기를, 아빠의 그 특별한 목소리의 기억 그대로 여러분께 들려드리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