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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ri Lee Mar 27. 2020

“조선을 자주독립국가로 인정하였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 방문기 part 1.

지난 2월 15일, 그러니까 미국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 모처럼 주말에 남편과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워싱턴 디씨로 향했다. 역사적인 날이거나 한국과 관련된 중요한 행사에 참석할 때면 꼭 한복을 입는 내 나름 규칙이 있어서 신랑은 내가 옷장에서 주섬주섬 한복을 꺼낼 때 “아 오늘이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을 가는 날이구나” 알았다.   


해설을 들으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 해서 1월에 온라인으로 예약을 해두고 그때부터 

“우와 3주 있으면 대한제국 공사관 간다”

“2주만 더!”

“다음 주다 다음주우우” 했기에 역알못 우리 신랑도 자기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 같다.  

2020년 2월 15일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의 모습

지금 글을 쓰는 시점이 3월 말이니까 다녀온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직접 가서 찍은 사진도 기록한 내용도 아직 정리를 못한 상태여서 그 기억들이 다 증발해버리기 전, 이 공간에 주미대한제국공사관에 관련된 내용과 그에 앞서 한국과 미국의 외교가 시작된 배경부터 후루룩 다뤄보려고 한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 미국 워싱턴 디씨에 세워지게 된 배경에는 1882년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있고, 조약 체결 이후에 파견된 보빙사로 물꼬가 트였다. 


고등학교 때, 개항기 파트는 “한국사 지뢰밭”으로 불렸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그리고 동학농민운동까지 줄줄이 등장하는 서양 열강들과의 온갖 조약들 때문에 이 파트를 공부할 때 골머리를 앓았던 기억이 난다. 앞 단원에서 간신히 붕당정치를 넘기고 났더니, “어서 와, 조약은 처음이지?”하고 악랄한 웃음을 짓는 것 같아서 정말 고통스러워하며 외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오늘은 미국과의 조약만, 그것도 조미수호통상조약만을 다룰 것이기 때문에, 진정하자.  


다른 조약들보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조금 더 특별한 이유는, 우리나라가 서양 국가 최초로 미국과 근대적 조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근대적 조약이라는 말에 “오 우리도 드디어 서양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건가”하는 설렘도 잠시, 고등학교 때 한국사 선생님이 “서양과 맺은 최초의 조약. 자 그리고 최혜국대우에 밑줄 쳐”했던 기억이 난다. 아직까지 근대적 조약에 서툴고 익숙하지 않았던 조선은 우리의 이권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최혜국대우를 조항에 넣었다. 그것이 발단이 되어 이후 서양 열강들은 작은 조선을 두고 이권 침탈 경쟁을 박 터지게 해댔다.  


어쨌든, 1882년 5월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나서 이듬해 1883년에 서울 정동에 미국 공사관이 세워졌다. 이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한국과 미국 사이에 “외교”라는 것이 시작되었다. 당시 정동에 와있던 주한 미군 대사가 쉽게 말해 ‘야, 나도 왔으니, 조선 너네도 대표단 꾸려서 몇 명 미국으로 보내’라고 사절단을 미국으로 보낼 것을 권유했고, 그래서 만들어진 게 보빙사이다.  


1883년에 처음 민영익을 대표로 한 보빙사가 파견이 되었는데, 이때 꾸려진 보빙사 일행이 11 정도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모두 조선 관료로 꾸려진 게 아니라 이 중 청나라와 일본 통역관도 포함되어 함께 미국으로 갔다고 한다. 


약간 의아했다. 

아니 왜? 


왜 청나라랑 일본 통역관이 왜 가? 했지만, 당시 안타깝게도 조선인 중에는 중국어와 영어를 능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반면, 보빙사 중 대부분이 일본어를 구사를 할 수 있었게 때문에, 미국인들과 의사소통을 하려면 일본어 통역관을 통해서 이중 통역을 해야 했다고 한다. 

한국어에서 일본어로, 그러면 일본어 통역관이 영어로 대신 전달.


이렇게 보빙사 일행은 미국에 가서 1883년 9월에 미국 제21대 대통령 아서를 만났다.  

당시 보빙사의 미국 방문 소식을 실었던 기사

여기서 궁금증이 생겼다. 


외교의 진면모를 익히 봐온 나로서는 “아니, 왜 미국이 조선에 관심을 갖지?” 궁금했다. 

내가 생각하기엔, 뭔가 빼먹을 것이 있거나 자국에 막대한 도움이 될 국가가 아닌 이상 괜히 쓸데없이 먼 땅까지 가서 공사관을 만들고 공사를 파견하고 보빙사를 초청하고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왜 미국이 굳이 조선에 접근했는지 이해가 안 갔다.  


내가 내린 결론은, 미국이 당시 조선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접근했던 것 같다. 

당시 조선의 주변국인 청과 일본은 서양 열강들과 무역을 매우 활발하게 하고 있었다.

미국에게 동아시아는 이색적이고 독특한, 귀족들이 좋아할 만한 (다른 말로 돈이 될만한) 귀중한 사치품들이 마구마구 쏟아져 나오는 보물 창고와 같은 나라들로 비춰졌을 것이다. 

동남아시아에 spice가 있다면 동아시아엔 비단과 은이 넘쳐났으니! 

이 보물 창고 같은 나라들과 이웃을 한 조선이란 나라도 당시 미국에게는 블루오션 같이 보였을지 모르겠다.  


여하튼, 미국은 조선과의 무역을 원했다. 산업혁명을 통해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미국은 자국의 공산품을 내다 팔 새로운 시장을 원했고, 미국의 레이다에 조선이 걸렸다. 조선의 내부 사정을 잘 몰랐던 당시 미국의 입장에선 조선은 미국에게 서양 열강들이 아직 개척되지 않은 돈이 될 상품시장으로 보였을 것이다.  


조선의 입장은 어떠했나? 

마냥 미국의 실리에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린 것은 아니다. 조선 나름도 철저히 손익을 따져봤을 때 미국과의 수교를 통해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겠다고 계산이 섰다.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보면,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청의 힘은 대단했다. 청은 조선을 자신의 속국으로 칭하고 싶었다. 이렇게 덩치 큰 깡패 같은 형이 작은 조선을 쥐고 흔들려고 할 때 파란 눈의 키 큰 형아가 와서 “야, 조선 건들지 마!”라고 하며 조선을 자주독립국가로 규정을 했기에, 당시 조선의 입장에선 파란 눈의 키 큰 형아에게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겠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청을 견제하는 방편으로 미국의 힘을 이용하고자 미국의 요구에 기꺼이 응했고 보빙사를 파견했다.  


물론, 미국이 정말 정의감에 불타서 조선을 자주독립국가로 인정한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외교라는 세계는 철저히 손익으로 움직이는 성향이 있어 득이 되면 어제의 원수와 손을 잡고 독이 된다면 형제의 의를 맹세한 국가와 손절 해버린다. 

한국사 개항기에서 등장하는 조약들을 공부하다 생긴 습관 중 하나는 “조선을 자주독립국가로 인정하였다”라는 대목을 보면 그 문구를 나도 모르게 째려본다. 외교에선 그 문구가 읽히는 그대로 순수한 목적에서 타국의 자주독립을 인정하는 경우는, 단연코 없다. 일본의 경우에도, 청의 경우에도, 그리고 이번에 미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신의 실리대로 조선을 이용하기 위해 청의 조선 속방 요구를 거절을 했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인정했다.  


어쨌든 미국과 조선 두 국가에게 이유는 다르지만 서로 당시에는 득이 되는 관계였기에 1882년 미국과 조선은 손을 잡았다. 


다음에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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