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대한제국공사관 방문기 part 2.
2020년을 살고 있는 입장에서 1880년대의 조선의 모습을 보면 마치 일방적인 짝사랑을 하는 비련의 주인공을 바라보는 것 같다. 고종이 너무 순진했던 걸까 시대가 너무 어지러워 맹목적으로 믿고 싶었던 걸까 고종은 거중조정 조약을, 그리고 미국을 믿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의 조약에 따르면 미국은 조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도와주기로 되어있다. 당시 청과 일본 사이에서 새우등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조선에겐 이보다 더 듬직한 조약은 없었으리라.
미국은 정의롭고 근대화된 선진국이니까 조약을 이행할 것이고 조선을 배반하지 않을 거라 고종은 철썩 같이 믿었다. 그러나 거중조정은 한 번도 실현되지 않은 죽은 문자로만 조약에 남게 되었다.
미국은 조선을 블루오션인 줄 알고 접근했다가 속속들이 알아보니 별로 이용가치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조선에 굳이 힘을 쓸 필요가 없다고 미국은 판단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리 없는 고종은 당시 미국은 우리를 구원해 줄 동아줄과 같은 것으로 여기고 조약을, 그리고 미국을 믿고 의지했다.
그러나 고종의 바람과는 달리 조선이 미국의 도움을 필요로 했을 때 미국은 조용했고,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공사관을 철수한 나라가 미국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조선의 개항기 속 미국을 들여다보면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그러나 또 한편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분명 미국이 조약의 조항들을 취사선택해서 자신에게 이익이 될 만한 것만 취하고 아닌 것을 버렸던 행동은 정말로 잘못된 거지만, 외교라는 것이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 하는 것이 원칙인데 당시 국제정세와 외교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고종의 무능함과 둔감함에도 문제가 있었으리라.
글을 쓰기 위해서 보빙사와 관련해 더 찾아본 결과 재미있는 사실들을 알게 되어 이번 편에 소개해 보려고 한다.
한 번도 태극기가 언제부터 쓰였는지 태극기의 탄생에 대해서 생각 해본일이 없었다. 이번에 공부를 하면서 태극기가 보빙사가 미국을 가던 1883년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극기뿐만이 아니라 한글로 된 국서와 “조선”이라는 연호가 보빙사를 파견하면서 다 처음 공식적으로 쓰였다.
새삼 태극기의 데뷔와 한문을 대신해 처음으로 조선의 자주성과 한글의 아름다움을 서양인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무대가 보빙사를 통해서라고 생각을 하니 마냥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다.
또한 이번에 공부를 하면서 여러 생각하게 만들었던 부분이 보빙사를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진 신문물들이다.
1884년에 우체국 전신인 우정총국이 세워졌다. 1883년 미국을 다녀온 거의 직후에 만들어졌으니 분명 미국 방문이 큰 자극으로 작용되었던 것 같다. 교역을 했던 대상이 미국이 처음이 아닐 텐데 그 전에는 왜 우체국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미국과의 수교가 당시 조선인들에게 어떠한 자극을 줬길래 보빙사로 다녀온 바로 이듬해에 우체국을 만들었을까 하는 재미있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청이나 일본과 같은 비교적 가까운 국가들과 교역을 하고 소통을 하다 보니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크게 거리감을 느끼지도 않았고, 또 그래서 서신을 전문적으로 전달해주는 시스템 자체에 대한 필요성을 딱히 못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미국을 가서 이런 먼 나라와도 교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보니 말 타고 배 타고 소식 전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되어 우정총국을 만들 필요성을 느꼈나? 하고 생각을 했다. 물론 우정총국이 제 역할을 해보기도 전에 갑신정변으로 인해 개국 축하 파티가 결국 폐국 파티가 되어버렸지만…
또 1886년에는 조선 후기 최초의 근대식 공립 교육기관이었던 육영공원이 설립되기도 했다. 공립 교육기간이긴 하였으나 영어 교육을 강조하고 고급 양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해서 공립 교육 기관으로서 대중 교육에 얼마나 기여를 했는지에 대한 것은 잘 모르겠으나, 육영공원이 친미 인사들을 많이 배출하는데 기여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최초 보빙사를 보낼 때 조선인 중에서 영어에 능통한 자가 없어서 청과 일본 출신의 통역관을 대동해야 했던 아픈 과거가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육영공원은 헐버트를 교사로 초빙하여 영어 교육을 강조했고, 자연스럽게 영어에 능통한 출신 집안이 좋은 자제들을 많이 배출했다. 이들은 관직에 오르고 미국과 소통을 담당하면서 자연스럽게 친미 인사들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예를 들어서 참 유감이긴 하지만 육영공원에서 수학한 대표적 친미 인사 중에 하나가 이완용이다. 이완용은 처음부터 친일파가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은 일본어를 아예 못하고 영어에 능통한 대표적 친미 인사였다고 한다… (반전의 미학을 아는 역사… 이래서 역사가 재밌나 보다)
이 편에서 소개할 마지막 신문물은 1887년 경복궁 건청궁에 조선 최초로 설치된 백열전구다. 건청궁 하면 나에겐 늘 어둡고 슬픈 공간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건청궁 앞에서 사진을 찍을 땐 난 절대 웃지 않는다.
이런 건청궁에 조선 최초로 전기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기분이 복잡해졌다.
1887년에 처음 전기가 반짝 들어왔을 때 신기하고 기뻐했을 명성황후의 모습
또 곧 역사 속에서 가장 아프고 어두운 부분의 배경이 될 이 곳을 신문물이 환하게 밝혔을 모습이,
명성황후의 마지막과 너무 대조되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조선 최초의 백열등에 관련된 생각나는 일화 중 하나가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이때 전기를 건청궁으로 끌어오려고 하는 와중에 (정확히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으나) 건청궁 주변에 있던 연못을 너무 뜨겁게 달구는 바람에 연못 안의 물고기들이 다 이승을 떠나는 그런 웃픈 해프닝이 있었다는 것을 출처가 불분명한 어딘가에서 들어 경복궁을 가서 연못만 보면 “여긴가…?”하고 혼자 중얼거린다.
다시 보빙사로 돌아가서,
보빙사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면서 약간 의아했던 부분 중에 하나는 보빙사를 함께 갔던 민영익과 홍영식이 이후 갑신정변 때는 전혀 다른 길로 갈라서게 되는 점이다. 보빙사를 갔던 게 1883년이고 갑신정변이 일어난 시기가 1884년인데, 어떻게 이 빠른 시간 안에 사상적 동지가 갈라서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민영익과 홍영식은 미국에서 돌아오는 경로가 달랐다. 민영익은 보빙사 업무를 마치고 미국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럽까지 돌아보고 오면서 조선의 근대화에 현실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나라는 청이라고 판단을 했던 것 같다. 반면, 김옥균과 홍영식은 임오군란 이후 더 노골화된 청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을 했던 것 같다. 일본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청을 몰아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들은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미국을 다녀오면서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조선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고 자극을 받고 온 것은 분명 가치 있고 조선의 입장에선 보빙사를 파견한 보람이 있는 일이다. 그러나 어느 나라든 처해 있는 상황과 그에 따라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는 속도가 다 다르다. 하지만 홍영식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들은 선진 문물의 메카였던 미국을 보고 와서 마음이 급한 나머지 우리에게 더 맞는 방법을 모색하는 대신 도달해야 할 높은 목표만을 바라본 나머지 성급하게 무리를 했다. 결국 이들의 원대한 꿈은 삼일천하로 그쳤다.
외세를 쫓아내기 위해서 또 다른 외세를 끌어들이는 일… 혹자는 당시 우리에겐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근대화에 한발 짝 더 다가가려는 시도인 점에서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은 (급진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이 나서 내가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현명한 이이제이(以夷制夷)가 아니라 생선 가게에 든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들인 것과 같다.
보빙사, 더 정확히는 한국과 미국의 수교와 관련된 글을 쓰려고 하면서 이 시기와 그리고 미국과 관련된 나름 재미있고 생각해볼 만한 부분들이 있어서 이번 편에 다뤘다.
쓰면서도 느꼈지만, 역사는 단편적이지 않다. 입체적이다.
겉으로는 근대화에 다가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면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우리가 그토록 무리하면서까지 바랬던 근대화가 침략의 수단으로 변해 우리에게 칼끝을 겨누게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이 사실을 과거 조선은 알지 못했다.
다음 편에선 본격적으로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을 소개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