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일에 진심인 미국에서 가장 홀대받는 기념일
미국의 Thanksgiving, 그러니까 추수 감사절은 약간 둘째 같은 느낌이다. 핼러윈과 크리스마스 사이에 껴서 축하는 하지만... 뭔가 충분히 예뻐하거나 우려먹지 않는 듯한 느낌이랄까. 미국의 핼러윈 사랑은 전에 설명한 적이 있는데, 막내인 크리스마스에 비하면 훨씬 부족한 사랑을 받지만 연속된 빨간 날의 시작인 만큼 다들 많이 신이 나 있다. 10월 초부터 대부분의 마트가 핼러윈 콘셉트에 잡아먹히는 바람에 이미 핼러윈이 된 줄 알았었다. 그런데 11월에는 추수감사절 제품이 좀 나오다 말고 갑자기 크리스마스가 치고 나온다. 11월부터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온갖 크리스마스 장식품 때문에 내가 시간여행을 했나 싶을 수도 있다.
많은 미국인들이 계절이나 기념일에 맞춰 집을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 제니와 앤드류는 그때그때 어울리는 장식품을 박스에 담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크리스마스 박스는 다른 기념일의 두세 배는 되었다. 그래도 Thanksgiving의 주 동안은 집을 온통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우리나라로 치면 추석과 같은 기념일이다. 가족이 다 모여 각종 나물이나 전 대신에 칠면조와 으깬 감자 등을 먹는 것이 전통이다. 정말 이때는 평소에 많이 안 먹던 사람들도 푸드 파이터처럼 먹는 신기한 현상이 벌어진다. 명절에 살찌는 건 전 세계 공통인가.
이 날 처음으로 제니의 엄마, 그러니까 케이티의 할머니를 만났다. 우리나라의 할머니 이미지와는 다르게 에너제틱한 느낌이었지만 손자 손녀들 많이 먹으라는 점은 똑같았다. 제니의 여동생 둘과 남편들, 애들까지 다 모이자 꽤 큰 대가족이었다. 다들 웬 동양인 소녀가 껴있는 게 어색할 법도 한데,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편하게 대해주어서 고마웠다. 가족끼리 사진을 찍을 때도 카메라 옆에서 서성거리는 날 보고 다들 빨리 와서 같이 찍자고 불렀다. 그때부터 조금씩 미국에도 우리 집, 우리 가족이 있는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 와중에도 웃기고 싶은 유쾌한 가족이라서 Thanksgiving 가족사진을 보면 내 티셔츠에는 디너롤빵의 영양성분표가 그려져 있고, 케이티는 크랜베리 소스, 토미는 칠면조였다. 제니와 앤드류의 셔츠엔 무슨 뜬금없는 말이 적혀 있길래 물어봤더니 도망간 것을 보니 왠지 야한 멘트가 아니었나 싶다.
추수감사절이 있는 주는 통째로 방학이라 아주 소중하다. 나와 제니는 함께 요리나 베이킹을 하는 데 재미 들려서 한 주 동안 만든 요리와 디저트가 열 가지는 넘을 것이다. 스콘, 롤케이크, 펌킨 스파이스 맛의 별별 디저트, 세 종류의 파이 등등 정말 많았다. 항상 맛있는 게 넘쳐나고 가족이 다 함께 따뜻한 시간을 보낸, 진정한 Thanksgiving이었다.
이름에 걸맞게 내가 감사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돌아보았다. 미국에 무사히 도착해서 큰 어려움 없이 지내는 것, 내 친구도 함께 와서 잘 지내고 있는 것, 좋은 호스트 가족, 좋은 친구들, 좋은 선생님을 만난 것, 그리고 나에게 이런 기회를 선물해준 부모님,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창문 밖으로 찬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리는 데도 방 안은 주황빛 온기가 감돌았다. 그렇게 추수감사절로 행복했던 한 주가 저물었다.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사람들은 분주하게 장식품을 다 정리한다. 그리고 집안 곳곳이 붉은색, 흰색, 초록색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벌써 크리스마스 시즌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