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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우 Aug 02. 2023

<생쥐와 인간>,  그리고 내 아메리칸 드림

행운을 가진 사람으로서 꾸는 꿈

내가 다닌 학교는 미국 학교 중에서도 독특한 기말고사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주요 과목 다섯 개중 반은 1학기말에, 나머지는 2학기말에 시험을 보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들으면 대체 공부가 어떻게 되나 싶겠지만, 매 챕터마다 퀴즈, 단원마다 유닛테스트를 내주는 시험중독자 선생님들 덕에 언제 기말을 보는지는 큰 상관이 없었다. 그래도 1학기에 시험을 보면 그때까지 배운 내용뿐이라 비교적 안심이 되는데, 그 과목들이 프랑스어, 수학, 그리고 경제였다.

물론 기말고사 준비 기간이라고 해서 과제가 없는 것이 아니고, 기말이 없는 과목은 그 나름의 시험이나 과제로 대체하기 때문에 부담이 덜어지는 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기말 시험보다 나를 고생시켰던 과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영어의 <생쥐와 인간> 과제였다.


"자 학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당연히 소설이어야겠지? 드디어 너희들이 제일 좋아하는 장르다! 방학하기 전에 읽는 마지막 책이니까 다 읽고 과제가 있을 거야. 에이, 벌써 표정이 왜 그래? 정말 재밌는 걸로 준비했으니까 기대해."

'한숨이 절로 나오죠, 선생님. 학기말이라 안 그래도 바쁜데. 게다가 재미있는 과제란 건 선생님이 재미있는 과제라는 뜻이잖아요'라고 생각만 했다. 사실 기말 과제는 선택지가 세 가지 있었는데, 에세이, 시, 뒷이야기 쓰기였다. 그나마 편한 뒷이야기를 골랐지만 1200 단어 이상이라 막막하긴 마찬가지였다. <생쥐와 인간>의 첫 페이지를 펼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193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 <생쥐와 인간>의 주인공은 조지와 레니다. 조지는 작고 영리하지만 레니는 어린아이의 지능을 가졌고 곰과 덩치가 비슷하다. 조지는 레니의 보호자이자 친구로 항상 함께한다. 둘은 말썽을 일으키는 레니 때문에 여러 농장을 돌아다니며 일한다. 언젠가 소박한 농장 하나를 얻어 레니가 좋아하는 토끼도 키우고 스스로 먹고사는 것이 조지와 레니의 꿈, 아메리칸 드림이다. 새로 도착한 농장에는 등이 굽은 흑인 노예도, 손 하나가 없는 노인 캔디도, 일꾼 중 하나의 아내이자 유일한 여성도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고 있었다. 소설은 꿈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잔인하게 뺏어간다. 이 짧은 이야기의 끝에서 조지는 전보다 조금 더 큰 일을 저지른 레니를 자신의 손으로 떠나보내고 만다.


<생쥐와 인간>은 '아메리칸 드림'이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이곳에 온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30년대와는 많이 달라진 시대, 그렇지만 생각보다 많이 비슷한 인간. 새로운 땅이 새로운 무언가를 이루어 줄 거라고 기대한다면 완전한 허상이다. 누구나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곳에서, 이상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 아메리칸 드림이라면 왜 기회는 공평하지 않은 걸까. 여전히 소외된 사람들이 있고 차별이 있다. 나는 어느 집단에 속해 있는지, 내 앞길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옳은지, 내 이상이 현실보다는 망상에 가까운 것인지, 답을 정할 수 없는 질문만이 나를 괴롭혔다.


"선생님, 아메리칸 드림이란 잔인한 희망일까요, 꿈을 이루어 주는 마법 같은 기회일까요?"

"마법 같은 건 없지. 결국 내가 하는 선택이 나를 만드는 거니까."

"그런데 그 선택의 폭이 공평하지 못한 걸요?"

"행운이 따라준 사람들은 그 행운에 보답해야겠지?"

"그럼, 전 이미 받은 행운이 많거든요. 거기서 제 힘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봐야겠어요. 그럼 어쩌면 저 만한 조건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내가 보기엔 이미 네가 아주 좋은 방향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


내가 쓰는 이야기에서라도 조지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한번 쓰인 캐릭터는 자아를 가지고 있단 말이 사실이었다.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조지가 내게 말했다. 자신은 떠나야 한다고. 어디로 가는지 아직 알 수 없지만 혼자서는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 없다고 했다. 난 조지가 가고 싶어 하는 길로 보내주기로 했다. 그도 나처럼 방향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날 저녁, 조지는 다른 일꾼들과 슬림, 캔디에게 작별 인사를 전했다. 슬림이 물었다.

"온 길로 되돌아가는 겐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일할 농장을 찾아봐야죠. 날 받아줄 곳이 있다면요." 조지가 대답했다.

"... 아마 되돌아가진 못할 것 같아요."

"행운을 빌어, 조지." 슬림이 말했다.

"그래, 행운을 비네." 캔디가 덧붙였다.

캔디는 그 자리에 멈춘 것처럼 떠나는 조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평선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붉은색과 오렌지색이 구름에 불을 지르듯 퍼져 나가며 조지 앞에 놓인 길을 물들였다. 농장에서는 일꾼들의 부산스러운 외침과 편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조지의 귀에 닿은 것은 터벅터벅 걸어가는 자신의 발소리뿐이었다.

한 사람의 발소리. 조지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소리였다. 외로움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는 아주 오래전에 알던 누군가처럼 묵직한 발걸음을 옮겼다. 발끝은 끌리고 팔은 힘없이 덜렁거렸다. 따뜻하고 건조한 바람에 실려온 모래가 조지의 눈을 찌른 탓에 슬그머니 눈물이 고였다. 산들거리는 바람결에 언뜻 어떤 목소리가 실려왔다.

발이 닿는 대로 걷고, 마음이 가는 대로 걸었다. 목적지는 모른 채, 그러나 자신이 꿈꿨던 것과는 아주 먼 곳에 다다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채로 나아갔다. 태양은 잠자리에 들기 전, 조지 뒤에 그보다 훨씬 크고, 곰처럼 보이는 그림자를 그렸다. 조지와 그의 그림자는 함께 발맞춰 걸으며 붉은빛의 황톳길 너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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