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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우 Jul 04. 2023

뮤지컬 <데스노트>,
놈의 마음 속으로


엄청난 흥행 신화를 쓴 뮤지컬 <데스노트>. 드물게 바로 두 번째 시즌으로 돌아와 지방 공연까지 돌고 있는데, 매번 티켓팅에 실패하는 나에게 한 줄기 희망이 되어주었다. 이렇게 인기를 끄는 작품들 중, 작품성이 아닌 참여한 배우의 화력으로 극을 이끌어 가는 경우가 자주 보이지만, 데스노트는 작품 자체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주고 싶다.


원작은 읽은 적이 없어 뮤지컬의 줄거리만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렇다.

모범생에 인기도 많은 고등학생 라이토. 경찰 청장인 아버지와 여동생과 함께 보내는 일상이 그에게는 너무 지루하다. 어느 날, 길거리에 떨어진 검은 노트, 그러니까 데스노트를 발견한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뉴스에 나오던 유괴범의 이름을 적자 그가 실제로 사망한다. 라이토는 그 힘을 이용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며 범죄자들의 이름을 마구 적어내고 경찰은 이 미스터리한 사망 사건들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답을 찾을 수 없어 조급해진 경찰은 어떤 사건도 해결한다는 익명의 탐정, 엘에게 연락한다. 라이토와 엘의 추격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미 이번 시즌에 참여한 배우들의 능력은 아주 잘 검증되어 있으니 내가 말을 얹을 필요는 없겠다. 그 이외에도 할 이야기가 많은 작품이니까. 이 뮤지컬은 영상을 활용한 연출이 아주 많이 쓰이는데, 데스노트 특유의 신비롭고 암울한 분위기를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창의적인 배경을 활용해 마냥 어두운 극이 아니라 고유한 무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선으로 엘과 라이토, 사신과 인간, 정의와 오만 등 다양한 경계를 표현하는 연출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장면들에 깊이를 더한다. 특히 막이 오르기 전, 수많은 시곗바늘이 째깍 째깍 돌아가는 영상은 작품의 중심을 그대로 드러낸 디테일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이 뮤지컬의 정체성 같은 넘버, '데스노트'는 뮤지컬 팬이 아니라도 한번쯤 들어 본 경우가 많다. 넘버가 진행되는 도중에 라이토의 심리가 돌풍이 휘몰아치듯 변화하기 때문에 숨을 죽이고 집중하게 된다. 쭉쭉 뻗는 정직한 목소리에서 거칠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변화하는 라이토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거의 유일하게 밝고 감성적인 분위기로 극을 환기시켜 주는 미사의 곡들은 중독성이 강해서 'I'm ready'를 흥얼거리며 극장을 나서게 될 수도 있다. 엘과 라이토의 테니스 경기에서 '놈의 마음 속으로'가 울려 퍼지는 순간은 테니스 공처럼 빠르게, 강렬하게 입장이 전환되는 긴장감에 관객도 등을 쫙 펴게 된다.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캐릭터는 엘이다. 포스터를 보면 굳이 의자 위에 까치발로 앉아 초췌한 모습을 뽐내고 있는데, 이런 모습 때문에 데스노트를 처음 접하는 분들이 사신이 아닌가 하고 많이 착각을 한다. 엘은 배우에 따라 아예 다른 캐릭터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독특한 경우인데, 김준수의 엘은 광기가 남다르고 게임을 즐기는 듯한 이미지라면, 김성철의 엘은 동작도 표현도 부드러운 엘로, 탐정의 면모를 더 드러내는 느낌이랄까. 라이토 또한 배우에 따라 좀 더 오만하고 계략적이거나 침착하고 미성숙하게 나타난다. 이런 차이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누가 각색했는지 숨막히는 긴장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두뇌 싸움, 캐릭터의 심리 변화 등을 굉장히 자세히 느끼게 해 주는 스토리다. 데스노트를 만진 사람들에게 보이는 사신들이 약방의 감초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이후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데스노트의 주인, 미사의 태도가 어떻게 라이토와 대비되는지 관찰하는 것도 인상적인 포인트다.

추리, 미스터리, 약간의 유머와 로맨스가 균형을 잘 잡고 있지만 재미만을 위한 극이라고 하기엔 아쉽다. 한 발짝만 더 들어가 보면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앞에 선 인간에 대해 노래하는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라이토가 서서히 선을 넘고 신의 힘에 취해, 스스로를 어둠 속으로 이끄는 모습을 보면서도 이상하게 미워할 수는 없었다. 오만과 우월감이 뚝뚝 묻어나는 라이토를 냉정하게 외면할 수 없었던 건 미성숙한 고등학생의 잘못된 믿음에 대한 연민 때문일까, 아님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심판의 저울을 상기 시켜 주기 때문일까? 결국 정의 구현의 가면을 쓰고 신이 되고자 했던 그는 최후의 대가를 치르고, 데스노트의 힘으로 무장한 갑옷 아래 초라한 인간을 드러낸다.


이름 있는 공연으로, 뮤지컬이 낯선 분들도 많이 접하는 공연인 만큼, 멋진 배우분들 뿐만 아니라, 그 자체의 작품성도 잘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에 글을 쓴다. 솔직히 공연을 보다가 '야, 라이토, 그러다가 데스노트에 이름 적히겠다?' 라고 생각한 게, 나뿐만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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