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처럼 사는 우리들이 주인공인 공연
'엄마, <빨래> 한대!' '누가 빨래를 한다고?' 제목만으로 웃음을 주는 뮤지컬 <빨래>.
투박하고 거친 것 같으면서도 가슴 깊숙이 들어오는 따뜻한 위로 그 자체인 <빨래>는 자유자재로 관객을 웃기고 울린다. 웃기고 있는데도 그 무게가 느껴지는 건 유머 뒤의 조금은 어두운 현실 때문일 것이다. 많은 관객이 아직 어려워하는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통해 낯설지 않은 우리 모습을 보여준다.
서울살이 오 년, 여섯 번째 이사를 온 나영. 쥐꼬리 월급에 짜증 나는 사장이 있는 서점에서 일한다. 참고 또 참기만 하는 인생에서 딱 한 번 참지 못하자 그 대가가 너무 크다. 한국에 오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을 믿고 몽골에서 온 공장 노동자 솔롱고는 밀린 월급도 받지 못하고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나영의 집주인 할머니도 옆방의 희정엄마도 매일매일이 힘겨운, 관객석에 앉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빨래>다.
<빨래>의 배우들은 꾸밈없는 현실 연기와 진솔한 목소리로, 빨랫감을 물에 푹 적시고 탈탈 털어놓듯, 관객의 감정을 쥐락펴락한다. 나도 모르게 나영처럼 분노가 끓어오르고, 할머니의 말에 눈시울이 붉어지고, 슈퍼 아저씨의 농담에 웃음이 터진다.
오프닝부터 '서울살이 몇 핸가요?'로 친근하게 다가오는 빨래는 넘버들이 슬며시 미소 짓게 하고 웃음을 터뜨리게 하다가도 마음 한편이 아려온다. '나 한국말 다 알아'라는 넘버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잘하는 한국어 표현들로 그들이 마주하는 현실을 얼굴이 붉어지도록 솔직히 노래한다. 가장 유명한 넘버는 아마 솔롱고의 '참 예뻐요'일 것이다. 순수하게 나영에게 빠져드는 솔롱고의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자연스레 둘을 응원하게 될 것이다. 할머니와 희정엄마가 나영을 위로하며 부르는 '슬플 땐 빨래를 해'라는 넘버는 누구라도 울컥하게 되는 마법 같은 노래다. 우린 다들 가끔 위로가 필요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대학로 공연인만큼 연출에 큰 화려함은 없다. 그러나 소박함이 초호화 무대들보다 깊은 감동을 줄 때도 있는 법이다. 공연이 시작하기 전이나 인터미션 때 무대를 한번 유심히 보면, '십일조 교회'나 에어컨 실외기의 가짜 로고, 진짜 미용실에서 뜯어 온 것 같은 돌아가는 간판 같이 재미있는 디테일이 많다. 무대 장치보다는 배우들의 연기력에 의존해 배경을 구현하는데, 소품 하나 없이도 바쁘게 달리는 버스 한 대를 눈앞에 가져다 놓는다. 미어터지게 좁은 객석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모양새조차도 <빨래>의 정신 그 자체다.
<빨래>의 깊이는 그 직관적인 특성에 있다. 이름부터 정직한 <빨래>는 대사나 연출 등이 유연하면서도 굉장히 묵직하고 간단명료하다. 사지절단 장애인, 그런 딸을 위해 목숨을 붙들고 사는 할머니, 사랑도 자신도 잃어버린 아주머니, 불법 체류 노동자인 마이클과 솔롱고. 직장 상사의 부당한 취급을 참기만 하며 살아가는 나영. 다들 숨기고 싶고, 고개 돌리고 싶은 현실을 대놓고 외친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은 팍팍한 상황과 막막한 아픔을 세상에 내놓는 대담함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걸까.
이 뮤지컬은 뒷배경의 사람들의 이야기에 조명을 비춰준다. 자신이 주인공인 것처럼 인생을 살라고 하지만, 정작 엑스트라 1번도 아닌 17번쯤처럼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내 삶의 주인공은 나라는 걸 잊고 살기 쉽고, 어쩌면 그게 편할 때도 있으나, 빨래를 보고도 그 정도에 안주한다면 집주인 할머니가 빨래하다 말고 시원하게 욕을 날려주실 것이다.
빨래를 할 때 우리는 더러워진 옷가지, 똥기저귀, 이불 등등 빨랫거리를 모아 치대고, 박박 때를 긁어내고, 퍽퍽하고 밟아서 깨끗하게 빨아 바람 잘 드는 곳에 널어둔다. 그런데 정작 우리 자신이 이리저리 치여 지치고 아플 때, 상처를 드러내 맘대로 아파하고, 아물 시간을 주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그럴 땐 빨래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