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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우 Oct 22. 2023

사랑은 마치, <레드북>처럼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줘요

배경이 영국이라 오해를 사지만 한국의 창작 뮤지컬인 <레드북>. 환영받지 못하거나, 이해받지 못하는 모두를 오색빛깔의 음표로 위로하는 극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신사와 숙녀는 환영하지만 여러분, 그러니까 나머지는 환영해주지 않는다. 그곳에 숙녀라고 하기 어려운 한 여자가 일자리를 찾는데, 그것이 바로 안나다. 그리고 안나가 모시던 할머니의 손자인 어떤 신사가, 그 유산을 전달하러 안나를 찾아온다. 그 신사의 이름은 브라운. 안나의 간절한 부탁에 브라운은 얼떨결에 안나를 비서로 채용한다. 브라운이 그를 떼어내기 위해 이야기를 써 보라고 제안하자 안나는 감명을 받고 같은 바람을 가진 여성들이 모인 곳, 로렐라이 언덕으로 찾아간다. 안나의 펜이 춤을 추며 써낸 것은 바로 <레드북>, 야한 이야기다. 사회는 과연 안나의 새빨간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레드북>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인 만큼, 유머와 진심 사이에서 완벽한 줄다리기를 한다. 자칫 치우치거나 무거운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음에도, 편견을 시원하고 재치 있게 깨버린다. 예쁜 거울처럼 현대 사회의 모습, 그리고 그 속에 우리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무엇보다 정말 살아 숨 쉬는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게 매력적이다. 조연 하나까지도 본인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실감 나게 하는 스토리다.  


<레드북>의 연출은 반짝거리고 아기자기한 무대로 예술성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눈과 귀, 마음이 모두 사랑에 흠뻑 젖게 만드는 뮤지컬이다. 빅토리아 시대와 어울리는 파스텔톤 색감에 강렬하게 등장하는 붉은 책이, 시각적으로도 <레드북>이 가져오는 파격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숨기고자 해도 숨길 수 없는, 야하고 강렬한 레드의 특성을 마음껏 이용한다. 또한 정적인 배경 속에서 유독 흩날리는 이불, 깃털, 종잇장 등이 많이 사용되면서, 우아하면서도 자유롭고자 하는 극의 본질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했다. 


<레드북>의 넘버는 창작뮤지컬의 묘미를 마음껏 즐기게 해 준다. 우리말에 딱 맞게 맛깔난 대사와 가사는 물론이고 통통 튀다가도 가슴이 아리게 만드는 넘버까지, 안나라는 사람의 강렬하면서도 서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멜로디와 고전적인 영국의 분위기가 어우러진다. 정성이 담긴 손으로 예쁘게 쓰인 글자들에 알록달록한 색을 칠하듯 음표가 더해진다. 설레는 운율로 가득한 <사랑은 마치>처럼, 첫 소절에 사랑에 빠지게 되는 넘버가 많다. 1막의 끝에서 안나가 <나는 야한 여자>를 부르고, 2막의 끝에서는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라는 넘버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감동 포인트이다.




<레드북>은 다양한 사랑에 대해 노래한다. 이성을 사랑하는 마음,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나를 사랑하는 마음 등등. 극이 진행되며 브라운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안나는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브라운의 서사는 재촉되지 않아서 설득력이 있다. <신사의 도리>로 보여주는 그의 신념에 어떻게 금이 가고, 무너지며, 안 나와 사랑에 빠지는지를 섬세하게 나타내고 있다. 둘이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음에도 서로에게 끌리면서, 브라운은 안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극의 시작에서 안나의 털털한 말 한마디에도 한숨을 내쉬던 그는, 둘의 결말에서 오로지 안나를 위한 결정을 내린다. 

반면에 안나는 시작부터 내면의 방황을 겪는다. 깔끔한 네모 집에 사는, 멀끔한 틀 안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설 자리가 없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 자유롭고 당찬 영혼의 안나는 '난 뭐지'라고 질문을 던진다. 그런 안나가 글쓰기와 사랑에 빠진다. 함께 감옥에 갇혔던 노숙자 여인,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 남편과 사별한 바이올렛 할머니 모두 안나의 야한 이야기로 일어선다. 그리고 한 멀끔한 신사도 <레드북>으로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사회는 안나의 새빨간 이야기를 내버려 두지 않았지만, 안나가 자신에 대한 모든 확신을 잃어버린 순간, <레드북>의 힘이 빛을 발한다. <레드북>으로 용기를 얻은 모두가 안나에게 보답한 붉은 사랑으로, 그는 오래된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라고. 


<레드북>이 결국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줘요.'라고 할 수 있다. 관객석에 앉아있는 모두가 자신만의 무대에 주인공으로 올라서길 바라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안나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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